Page 107 - 칭의와 성화-김세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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럴 때에만 우리는 칭의 된 자들로서 ‘율법의 정당한 요구’를 성취하는 의인의 삶을 살게 됩
            니다(롬 8:3~4).




                2)      예정과 성도의 견인, 그리고 탈락의 가능성


            우리가 얻은 구원의 탈락의 가능성을 언급하면 많은 성도들은 교회에서 그렇게 배우지 않
            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고, 한 번 칭의 되면 최후
            심판에서 그 칭의가 자동적으로 확인된다고 믿는 것은 실은 구원파적 신앙입니다. 방금 살
            펴본 대로 성경은 우리가 구원의 은혜로부터 탈락할 가능성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고 있는
            데도, 일부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그들이 로마서 8:28~39와 같은
            구절들에 일방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8~39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끝까지 지켜 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세 전부터 구원으로 예정하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의인으로 만들 계획이 있었으므로 우
            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때까지, 구원의 완성에 이를 때까지 지켜 주신다고 말합니다.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으리요!”라고 외치며 바울
            이 웅변을 쏟아 냅니다. 이 우주 안에 있는 어떤 세력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전통 신학에서는 이런 하나님의 지켜 주심을 ‘성도의 견인’이라고 합니
            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타락의 가능성’ 또한 엄연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히
            6:9~20 참조). 그렇다면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데 어떻게 구원의 은혜로부터의 타락/탈락
            이 가능합니까?
            표면적으로 보면 논리적 모순이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표면적으로, 논리적으로 서로
            모순되는 가르침들이 여럿 있습니다. 이런 때 이 둘 사이의 논리적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그중 어느 하나만을 택하고 다른 하나를 약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아르미니안주의식으로
            예정과 성도의 견인의 교리를 약화시켜서도 안 되고, 칼빈주의식으로 타락의 가능성을 사
            실상 부인해도 안 됩니다.
            후자는 사변적이고 기계적인 예정론을 견지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펴기도 합니
            다. “진정으로 예정된 자는 타락할 수 없다. 고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배교하고 방탕한 삶을
            살고 있는 저 목사나 장로는 원래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산 것이 아니라 ‘단지 겉으로 믿는
            자같이 보이는 생활’(only apparent faith)을 한 것이다. 아니면 현재 그의 방탕한 삶은 ‘단
            지 겉으로 타락/탈락으로 보이는 것’(only apparent fall)이고 결국은 하나님의 지켜 주심으
            로 돌아서서 구원을 받게 된다.” 이런 식으로 성경의 타락/탈락의 가능성에 대한 경고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성경을 바르게 공경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 개신교도들에게는 어떤 교회사의 인물도 성경보다 더 위대하고 더 큰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칼빈이 가르쳤다고 생각하는 (좀 일방적인) 예정론을 추
            종하기 위해 성경에 분명히 구원의 은혜로부터 탈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가르침을 피
            하거나 경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의 대 원칙들 중 하나가 ‘성경대로만’(sola
            scriptura)입니다. 교회의 전통보다 성경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장로교의 일
            부가 자신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중세 가톨릭교회의 신학 방법에 빠졌습니다.
            중세 신학자들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이나 교회의 전통에 맞추어 성경을 해석했던 것
            처럼, 지금 (한국) 장로교의 일부는 오로지 칼빈 또는 이른바 ‘칼빈주의’ 신학에 맞추어 성
            경을 해석하려고 합니다. 칼빈이 위대한 성경학자이고 신학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가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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