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9 - 칭의와 성화-김세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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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셔서 나로 하여금 구원의 완성에 이르게 하시는 분임을 가르치기 위해 펼치는 교리입니
다. 따라서 예정론은 구원이란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
는 것이라는 복음의 진리와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라는 복음의 진리, 이 두 교리들의 산
물입니다.
바울이(바울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특히 히브리서가) 하나님이 베푸시는 전적인 은혜에
의한 구원과 더불어 타락의 가능성이라는 두 가지 가르침들을 함께 가르치는데, 이들이 일
으키는 논리적 긴장을 의식하며 그들을 함께 견지할 때 우리는 건전한 신앙을 가질 수 있
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의식하고 거기에 순종해야 함을 의식하면서,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내가 과연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살고 있는가?’라는 마음을 갖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 있고 성
령의 깨우침을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실존의 매 순간마다 우리의 죄를
일깨워 주고, 그 죄를 회개하게 하고, 올바로 살고자 하는 의지를 주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
게 자신을 성찰할 수 있습니다. 그런 때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과도하게 걱정하고 불안
해하는 대신, 예정론과 성도의 견인론을 가르치는 성경의 본문들을 읽으면서 구원의 확신
을 회복하고 위로를 받으며, 성령의 인도함에 따라 의인으로서의 삶을 더 신실하게 살겠다
고 결단하면 됩니다.
반면에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은 하되 죄악에 곧잘 빠지는 자신의 모습을 의식하면서도(즉,
성령의 그러한 지적을 받으면서도, 성령의 지적을 뿌리치고) ‘나 예수 믿어, 이미 구원받았
어.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이고 하나님이 그것을 끝까지 지켜 주시기에 한 번 구
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하지 않아? 그러니 이렇게 살면 어때?’라고 자위하면서 계속 자만
과 방종에 빠져 있는 사람은 자신이 과연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 있는가, 그의 통치
를 받고 있는가, 이렇게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넘어지는 것은 아닌가 반성해야 합
니다. 그런 사람은 한 번 빛을 보고 구원을 맛본 자가 배교하면 두 번째 구원이 없다는 히
브리서 6:1~10의 경고를 심각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믿을 수 있음, 그래서 넘어질 수 있음을 가르치는 바울의 말씀들
을 진지하게 읽고 회개하는 가운데 신실한 믿음의 순종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이렇게 예정
론/성도의 견인론과 타락/탈락의 가능성에 대한 교리 간에 생기는 논리적 긴장을 유지하
면서 두 교리들을 함께 견지할 때, 이것이 건강한 신앙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성적, 합리적
으로 둘을 조화시키기 위해서 어느 한쪽을 약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예정론에 대해 그것이 의도하
는 바와 관계없이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은 구원하기로 예정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
게 하지 않았는가?”라는 식의 쓸데없는 질문을 하면서 스스로 미로로 빠져들어 가는데, 이
역시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일부 신학 전통에서 예정론을 그 의도와
관계없이 사변적으로 가르침으로써 많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런 질문을 갖고 괴로워하게
합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신자들에게 구원의 확신과 위안을 줄 목적으로 예정론을 전개합니
다. 즉, 구원의 첫 열매 받은 우리가 성령을 좇아 살아가는 한(즉,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살
려는 기본자세를 견지하는 한) 사탄의 시험과 고난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끝까지 우리
를 지켜 주셔서 종말의 구원의 완성을 받도록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
다.
그런데 예정론을 잘못 배운 많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예정론 때문에 더 불안해하기
도 합니다. 사실 한국에서나 외국에서나 성경과 교리를 편협하게 배운 그리스도인들이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