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 - PHOTODOT 2017년 3월호 VOL.40 M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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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경험한 과도기적 단계
                  사용하지 못하게 된 사진 한 뭉치가 그녀의 작업실 서랍에 고이 들어있다.
                  과거에 7년 가까이 공을 들여 작업한 결과물이지만 작가의 마음 한켠에 상
                  처로 남아버린 〈Whispering〉(2009-2013) 시리즈 중 일부다. 당시 그녀
                  는 모델들과 ‘20대 여성의 성’에 관한 진솔한 대화를 나누며 촬영을 진행했지
                  만 끝내 마음을 열지 못한 그들로부터 거절을 통보받았다. 애써 작업한 사진
                  을 작품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된 것은 작가의 입장에서 큰 상처였다. 그러나
                  김진희는 거절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모델들 역시 그들 개인의 상처에서 비
                  롯된 행동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의도치 않게 바늘과 실로 엉
                  기성기 사진 속 얼굴과 몸을 가리는 자위적인 행위를 시작했다. 표현주의 예
                  술가의 드로잉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러프한 바느질 자국이 마치 마음의 상
                  처를 봉합시킨 자국 같기도 했다. 상처와 치유를 겪게 해준 그 한 뭉치의 사
                  진이 외려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의 바탕이 된 것이다.
                         어설픈 위로와 공감, 치유의 행위
                  김진희는 마음에 위안이 되었던 바느질을 통해 다른 누군가의 마음도 보듬
                  고자 새로운 작업 〈She〉(2014) 시리즈를 시작했다. 이전 작업에서 경험했
                  던 ‘개인의 상처’에 주목하며 여성들 개개인의 기억, 상처, 트라우마가 이 작
                  업을 통해 치유될 수 있길 바랐다. 작가는 그들이 겪은 상처에 대해 진심으
                  로 공감하고자 최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결국 본인의 상처조
                  차 깨닫지 못하면서 어설프게 그들과 소통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 작가는
                  ‘타인의 기억과 상처에 온전히 공감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스스로 질문
                  을 던지고 ‘불가능’이라는 답을 내린다. 바느질 행위를 통해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려 했던 것을 ‘어설픈 위로와 공감, 치유의 행위’라고 정의하기도 했
                  다. 김진희는 이러한 생각들을 그대로 작품에 보여주고자 일부러 본래 의도
                  와 동떨어진 단어, 글귀들을 사진에 새겼다. 그럼에도 작가 자신은 해석할 수
                  없는 글자를 공들여 하나하나 수놓으며 사진 속 인물의 상처에 대해 생각하           “대화하는 과정에서 인상 깊었던 문구나 글 일부를
                  고 보듬으려는 노력을 오랜 시간 계속했다.                            발췌해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했어요.
                  한편, 작가에게 바느질은 어느새 누군가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행위로            구글 번역기를 이용해서 오역도 많았죠.
                  자리 잡았다. ‘덧대어 꿰맨다’ 혹은 ‘이어 붙인다’는 행위적인 의미와, 어머니,      앞뒤 맥락 없이 발췌한 문장은 이미 원래의 의미와
                  모성의 이미지와 연결된 ‘돌본다’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           멀어지고, 번역을 거쳐 모르는 나라말이 되면
                  다. 작업이 진행될수록 그녀의 바느질은 점차 다층적인 의미를 내포하게 되
                                                                     읽을 수조차 없어져요. 그 친구들이 과거에 겪은
                  는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바느질을 하려면 종이를 뚫어야 실을 꿸 수 있
                  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원본 사진에 상처를 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마치 치          상처에 대해서 진심으로 공감하는 게
                  유를 목적으로 누군가의 상처를 들춰내야 하는 〈She〉의 작업 과정처럼 말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 사실을 그대로
                  이다.                                                작품에 표현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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