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7 - 죽산조봉암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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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신의주 형무소를 나와
인천에 자리를 잡다
● 1939년
■ 7월, 일본 황태자 탄생 은사 가석방의 형식으로 신의주 형무소에서 나왔다.
출옥 후 딸을 찾아 인천으로 갔다. 후배 박남칠 등의 도움으로 인천비강업조
합을 설립해 운영했다.
■ 가을, 김조이와 재결합하여 경남 창원 김조이의 친정을 찾았다.
박남칠은 YMCA중학부 시절 조봉암의 후배였다. 일제의 회유로 전향했지만, 인천 미곡
상조합 조합장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적선활동을 많이 해 인천 지역에서 존경받
는 신진 사업가로 성장했다. 비강업은 벼를 찧을 때 먼저 나오는 왕겨를 모아 사료나 연
료로 공급하는 업종으로 조봉암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해 후배들이 조합을 급조했던 것
이다(이원규, 2009: 316-317).
● 1942년
■ 봄, 도산정(桃山町)(현 인천 중구 도원동) 12번지 부영주택으로 이사했다.
● 1945년
■ 1월, 예비구금령으로 용산 헌병사령부로 연행됐다.
[조선사상범예방(예비)구금령] 1941년 2월 공포된 것으로 다시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심증만으로도 사상범을 잡아넣을 수 있게 만든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악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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