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2 - 2021년 01월호 전시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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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과 컨템포러리 아트






























        종묘 영녕전




        단청의 역사                                          五彩)의 사용이 허용되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어 혹시나 건축물에도
                                                        단청이 적용되지 않았을까 짐작은 해 볼 수 있으나, 그 당시의 건축물은 전해
                                                        지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단청의 흔적을 전혀 알 수 없다. 하지만 최근 경
        글 : 박일선 (단청산수화 작가)                              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막새와 전돌에 장식된 문양을 살펴보면 당시 신라의 단
                                                        청이 섬세하고 아름다웠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때문에 삼국
                                                        시대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단청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는 설이 유력하며, 고구
                                                        려는 지리적으로 중국과 직접 국경을 마주하여 단청과 불교를 비롯한 중국의
                                                        문화가 가장 먼저 전해졌으며 그 후에 백제, 신라로 전해지고, 바다 건너 일본
                                                        에까지 건너가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시대의 단청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고려인들은 궁실(宮室)을 수축하
        우리나라 단청의 역사는 회화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했다고 볼 수 있다. 회화     기 좋아하며, 왕이 거처하는 궁궐의 구조는 둥근 기둥에 모난 두공(頭工)으로
        도 마찬가지이지만 한반도에서 언제부터 단청이 그려지기 시작했는지는 정          되었고, 날아갈 듯 연이은 대마루는 울긋불긋 문채나게 꾸며졌다.'고 하였으
        확하게 알 수 없다. 우리나라의 건축물은 대부분 목조 건축이다 보니 이를 입      며 '난간은 붉은 칠을 하고 동화(銅花)로 장식하였고, 단청의 무늬와 채색이 매
        증할 만할 건축물이나 유물은 남아있는 것이 없어 단청의 기원을 파악하기란        우 힘차고 아름다워 다른 전각들보다 뛰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 시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다만 삼국 시대의 고분 벽화를 통하여 그 당시의 단청을      궁궐의 규모와 단청은 전해오는 문헌상으로는 알 수 있지만 실체적인 단청
        유추해 볼 수 있다. 고분 벽화가 출현하기 훨씬 이전에도 단청이 있었다고 말      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고려 시대 건축물로 남아있는 것은 영주 부석사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삼국 시대의 고분 벽화만이 거의 유일하게 추정할 수       의 조사당,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 정도 뿐이다. 수덕사 대웅
        있는 유물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단청의 역사는 삼국 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         전에는 건립 당시에 그렸던 벽화와 단청의 흔적에서 남아 있는 색과 선을 보
        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싶다. 우리 역사에서 미술이나 회화란 단어를 사용하      면 문양이 간결하고 밝고 부드러운 고려 시대 단청의 일면을 짐작할 수 있다.
        기 이전에도 다양한 표현이 있었을 터이지만, 문헌상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
        에 쓰여진 신라 시대 솔거의 노송도에 대한 기록에서 미술, 즉 회화를 의미하      조선 왕조가 세워지고 숭유억불로 불교를 탄압했으나 역설적으로 단청이 발
        는 단어로서 단청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이 아마도 가장 오래된 기록        전하고 화려하게 꽃피운 시기는 바로 조선 시대였다. 개국 초기 한양으로 수도
        일 것이다. 삼국 시대 이전의 단청은 남아있는 유적이나 유물은 전혀 없으므       를 천도하며 새로 건립한 궁궐에는 모두 단청을 했다. 이는 당시 왕실이나 권
        로 고분 벽화나 고분에서 출토된 칠기 등의 유물에서 당시의 건축양식과 단청       력층인 유학자들이 궁궐이 목조 건물이기 때문에 단청을 했지 꼭 불교에만 쓰
        의 모습을 보여 주는 문양을 보면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이지 않는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유교 시책으로 인하여 종묘나 성균관, 사당 등에는 새로운 형식의 유교
        삼국 시대의 단청은 고구려 통구사신총(通溝四神塚)의 현실(玄室) 상단에 그       단청이라는 꽃을 피우게 되었다. 이른바 단청의 미니멀리즘(minimalism)이
        려진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이나, 환문총(環文塚)의 현실 모퉁이에 기둥, 두      라고 할까? 단청의 문양은 최대한 억제하였고 색상도 몇 가지만 사용하여 절
        공, 도리를 그려 목조건물처럼 아늑하게 꾸미고 벽면 전체에 동심원무늬를 그       제하면서 아주 단순하고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 냈다. 그
        린  것이나,  팔청리벽화고분(八淸里壁畫古墳),  안악제3호분(安岳第三號墳)      런 반면에 이와는 극히 대조적으로 건축 양식이 주심포형식에서 다포형식으
        등에 그려진 벽화에서 추정해 볼 수 있다. 신라에서는 성골 이상에게만 오채(      로 변화하면서 궁궐이나 사찰의 단청은 더욱 장식적이며 정교하고 화려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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