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3 - 2021년 01월호 전시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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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명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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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했다. 조선 중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쟁으로 파괴된 궁       면 조선 시대는 불교를 탄압하고 유교를 정치의 근본으로 삼았기에 궁궐이나
            궐과 사찰을 재건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빈번한 화재로 인한 복구 사업이 이어       유교 건물에는 절대로 단청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고 단청은 쇠퇴하거나 소
            짐으로써 단청 공사도 끊임없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조선 말기 고종 때      멸되었어야 했다. 또한 지극히 드문 사례지만 기독교 건물에도 단청을 한 예
            에는 나라의 국고를 탕진할 정도로 대규모 공사를 펼친 경복궁의 중건을 통해       를 빼놓을 수 없다. 바로 1900년에 세워진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이다. 기독교
            단청은 더욱 번창할 수 있었다. 개항과 전쟁을 통해 교역이 증가함에 따라 서      건물이지만 조선 말기에 한옥 구조의 목조 건축물로 짓다 보니 단청을 하였는
            양과 중국, 일본으로부터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면서 단청은 한층 다양하게 변       데 유교식 건물처럼 소박하게 가칠단청을 하였던 것이다. 기독교의 전파를 보
            화하고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역의 증가는 값비싼 전통안료를 대체할 수       다 쉽게 하기 위한 목적이 다분했지만 기독교와 단청의 융합을 시도한 점에서
            있는 저렴한 서양 안료의 수입으로 단청 공사를 더욱 활발히 시행할 수 있었기      매우 특이하게 느껴진다. 이렇듯 우리 역사와 함께 단청은 고난을 겪으며 변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휘(暉)와 금문(錦紋)이 가미됨으로써 단청      화하고 발전하였음을 보면서 오늘날 대다수의 우리들은 부지불식간에 단청
            의 양식과 문양의 장식성이 다양하고 복잡해졌으며 강한 색채의 대비로 더욱        을 불교적인 것으로만 인식하고 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세련되고 화려하게 발전되었다. 다시 말하면, 단청이 불교에만 쓰이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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