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3 - 전시가이드 2020년 11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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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전시





























                                        notte di settembre, 155×200cm                     viaggio romantico, 70×70cm




            문 앞 유흥가에서 들려오는 매춘부들의 싸움소리, 폭력에 의한 비명, 빈번하게      간이 그의 1차 전성기였다.
            들려오는 마피아의 총소리는 그의 가족에게는 일상적인 소리였다. 그에게는
            6살이 많은 큰 형이 있었는데 형은 자주 그림을 그리곤 했다. 안토니오는 그런     집시와 서커스
            형이 너무 멋있어 보이고 자랑스러 형을 따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안토       어느 날 ‘로미오와 줄리엣’,‘카사노바’의 의상으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다닐로
            니오가 5세가 되었을 때 가정형편이 어려워 보육원으로 보내졌고, 그해 첫 10     도나띠 (Danilo Donati)가 우연히 지인의 가게에 걸려있는 안토니오 스퀴치
            월 4일‘성 프란치스코 축일’을 맞이하자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성 프란치스코’     아리니의 그림을 보게 되었다. 그는 즉시 콜라보를 요청하였고 안토니오 스퀴
            를 그리라고 했다. 선생님은 안토니오의 파스텔 그림을 보고 먹지를 대고 베       치아리니는 영화 촬영 스튜디오인‘치네치타’(Cinecittà)에 합류하게 된다. 이
            꼈다고 할 정도로 정교한 그림에 재능을 발견하고  보육원에 있는 8년 동안 계     시기 이전에 유행하던 영화들의 의상은 주로 고전적이거나 화려했으며 이후
            속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해주었다.                     집시와 광대, 서커스 등을 주제로 한 영화들이 많아지면서 의상은 단순해지고
                                                            현대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코미디 영화가 유행하면서 연기자들
            안토니오 스퀴치아리니의 청소년기                               의 연기력은 더욱 중요해졌는데, 출연진들의 익살스러운 표정이나 슬프거나
            13세가 되었을 때 독일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아들의 천재적 재능을 알게 되       행복한 미소, 다양한 신체의 동작 등은 감성적인 안토니오의 마음에 강렬하게
            었고, 진심이 담긴 사과와 함께 그를 위한 개인 전시회를 열어주었다. 첫 전시     다가왔다. 안토니오의 작품 속 캐릭터의 모습은 더욱 다채롭게 살아났다. 어린
            회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리하여 첫 개인전에서 판매된 작품의 수입으로 보       나이에 수많은 경험을 한 안토니오는 예술가로서의 ‘영혼의 자유로움’을 추구
            육원에서 퇴원할 수 있었으며 모든 가족이 함께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한다. 그의 양심은 위선과 타협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에는 그 어떠
            학창시절에 수업이 없는 여름 휴가철을 이용해 리미니 (Rimini)나 비아레지     한 이데올로기적 성향이나 비판이 없다. 그래서 무겁지 않고 따듯하고 행복하
            오 (Viareggio) 등 지역에서 해변으로 놀러 오는 여행객들에게 초상화를 그려   다. 그는 페데리코 펠리니 소개로 마크샤갈 스튜디오에 거주했고 안토니오는
            팔았다. 하루 평균 100~120점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16~19세까지 총 40,000  마크 샤갈의 미학을 사사했다.
            여 점 이상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다. 이렇게 많은 양의 작업은 그에게 금
            전적인 풍요로움을 주었고, 다양한 경험은 그의 자신감과 자존감을 높여주         안토니오 스퀴치아리니는 300여 회 이상의 개인전 혹은 단체전을 열었으며
            는 계기가 되었다.                                      16세부터 수많은 우승컵을 수상했으며, 1973년 파리에서 열린 이탈리아 화가
                                                            전시에서의 우승컵을 획득했고 1973년 파리의 초상화 전시회에서 금메달을
            18세가 되었을 때 평소에 존경하던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에  획득했다. 1976년 밀라노 시 문화훈장을 받았고, 1977년 젊은 예술가들의 미
            게 화가로 인정을 받았으며 이탈리아의 경제 부흥기를 맞아 유럽 미술의 전        술 운동 “G.A.P”을 창립하였다. 1987년 라이 우노(Rai Uno)의 프레미오아르
            성기였던 1970년대를 거치면서 그의 영역은 유럽으로 넓어졌다. 1977년 그     떼 (PremioArte)에서 피포 바우도 (Pippo Baudo)에게 아트상을 수상함으로
            는 밀라노에 있는 브레라 국립미술원 (Accademia di belle arte di Brera)  써 당시 이탈리아 최고의 아티스트로 인정받게 되었다. 1994년부터 1996년까
            에 입학하여 회화, 조각, 데코레이션, 무대디자인 등을 수학하였고 수업 후에      지 바리의 유니온 갤러리(Union Gallery)에서 예술 총감독으로 활동하였으며,
            는 피카소의 세라믹 작업자였던 브루노 까시나리 (Bruno Cassinari)의 스튜  1996년에는‘산 베네데토 지중해 축제’(Festival del Mediterraneo)에서 평생
            디오에서 보조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낮에는 수학하고 밤에는 친구들과 함        공로상을 받았고, 1999년에는 나폴리 근교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며 유럽 최
            께 카페나 팝, 나이트클럽 등에 거대한 벽화를 작업해주거나 이곳에 오는 손       대 궁전인 카세르타 궁전 (Parco Reggia di Caserta)에서 성대한 개인전을 개
            님들에게 작품을 판매하여 생활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에게‘밤의 화가        최하였다. 2000년에는 나폴리에 있는‘미켈렌 젤로 국제 예술대학’에서 평생공
            (Pittore della notte)’라 불리게 되었다. 젊은 에너지로 왕성한 작업을 했던 이   로상 및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2001년 안토니오 스퀴치아리니는 이탈리아
            시기의 작품들이 ‘나이트클럽과 재즈 연주자’를 주제로 한 작품이었고 이 기       정부로부터 예술기사 (cavaliere dell’arte) 작위를 수여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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