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5 - 전시가이드 2020년 11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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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전시
마음의 창, 60×40cm. 사진4도분판필림, 물감(c.m.y.k), 밝은 창, 마음의 창, 60×40cm. 사진4도분판필림, 물감(c.m.y.k),
검용액, 중크롬산암모늄용 액, bfk250g수채화지, 붓 등 검용액, 중크롬산암모늄용 액, bfk250g수채화지, 붓 등
미학을 사진에 녹여내면서도 강렬한 색조를 과감하게 올려낸 이미지들은 의
외로 근대사를 관통한 도시의 흔적들과 조화를 이루며 정반합(正反合)의 독 그럼에도 미에 대한 감각과 사진에 대한 철학을 습득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특한 컴포지션을 만들어낸다. 폐가의 흔적으로부터 되새겨낸 풍경들, 다시는 워낙에 포기가 없는 성향이었고 70대에 손에 든 카메라이기에 “내 삶의 마지
돌아오지 않을 도시이미지를 찍기 위해 작가는 다양한 위험을 무릅쓰기도 여 막은 이 길뿐”이라는 다짐이었다. 기계에 대한 테크닉이나 컴퓨터에 대한 이
러 차례였다. 인사동 피맛골을 담은 사진들 속에는 1920년대 이상과 구본웅 해들이 어려웠고, 구세대라는 사회적 편견 때문에 매너리즘에 빠진 아카데믹
의 허물어진 기억이 담겨 있다. 한 사진계보다 막 졸업한 신진대학생들과의 교류나 그들의 힌트를 얻었다. 대
학편입도 나이로 거부당했지만 힘겹게 들어간 상상마당에서는 부딪혀 가며
사진의 회화화(繪畵化), 근대사의 흔적 위에 대가들의 추상화를 오마쥬한 작 도전했고, 한국의 대표 사진작가들을 찾아가 수학하면서 비은염프린트와 판
업들은 작가가 아카데믹한 대학교육을 받지 않았기에 가능한 결과인지 모른 화·실크스크린 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공정이 길지만 최근까지 하고 있는
다. 이러한 과감한 시도가 가능했던 것은 작가가 추상이전에 강렬한 색을 가 검프린트 작업은 은은하고 깊이 있는 회화적인 모뉴먼트와 잘 맞았고, 19-20
진 꽃정물화를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추상과 가장 가까운 대상물인 꽃은 세기초 유럽 화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 기법이기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이
그 자체로 다양한 색감과 풍부한 에너지를 포함한다. 일반 사진작가들이 플로 후 한옥란, 김수강, 임양환 교수 등을 사사하면서 깊이를 더해온 작가는 꽃정
리스트의 손을 빌리는 것과 달리, 작가는 꽃을 직접 고르고 꽃아 가장 아름다 물 사진을 제대로 찍기 위해 조명수업까지 찾아듣는 열정을 보였다. 이후 한
운 각도와 조명까지 고려한 꽃 사진을 찍는다. 특히 기존 작가들과의 차별성 옥란 교수와 함께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해온 작가는 40여회의 단체전과 꽃 아
을 두기 위해 등판에 실크스크린이나 판화기법을 활용한다. 앤디 워홀의 기법 이템만으로 2019년 4번의 초대전을 거쳤다.
을 차용(借用)하면서도 원(員)안에 이미지를 반복해 올려 내거나 그 안에 자
신만을 독특한 시각을 얹어내는 것이다. 작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단순하게 처 이 모든 시간들은 새로운 내용과 소재를 찾는 시간이었다. 한계점은 손에 익
리된 도시의 흔적과 평면적으로 마감된 면의 컴포지션은 우리의 삶을 총체적 히는 기법이 완성됐음에도 나만의 작품세계를 추구하는데 느낀 부족함에서
으로 은유하는 언어적 역할을 한다. 한국 근대사의 풍경을 함축적으로 드러낸 찾아왔다. 이 한계를 벗어나고자 한국현대미술아카데미와 다양한 갤러리투
회화적 관점은 간편하고 효율성만을 염두에 둔 오늘의 여러 욕망과 모순들에 어를 통해 미술이론을 채워나갔고, 일본 나오시마에서 이우환의 미니멀한 개
대한 작가적 해석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분히 사회적이면서도 당연히 회화적 념성과 박서보의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를 보면서 한국현대미술에 대한 개념
인 이홍순 만의 해석은 현대사를 몸소 체험하지 않았다면 담지 못할 우리 모 을 정립해 나갔다. 무엇보다 한국적인 것은 수묵과 추상으로 대표된다는 생각
두의 과거이자 현재 일지 모른다. 이 파고들었고, 다양한 평론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사진으로 미술에 대한 시
선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말 그대로 박서보의 작품에서 읽어
풍류로 보는 관조, 한국적 추상으로 나아가다 낸 비움과 수신(修身)은 풍류하며 세상을 즐겼던 우리네 선인(先人)들의 유유
70대 신진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이홍순은 유쾌하면서도 호탕한 성향을 가 자적하는 정신과 맥을 같이 한 것이다. 그렇게 결합한 회화로 보는 사진은 이
진 남녀노소 누구와 대화해도 소통가능한 아티스트다. 대학졸업 후 6년간 장 제 도시공간을 넘어 한국의 전통적인 흔적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돌담·궁궐·
교 생활을 하면서 월남전까지 참전했던 작가는 피엑스 담당을 할 만큼 영어에 기와파편·문화재ㅍ건축문화재(능과 사찰) 등을 사진으로 남기고 그 위에 추
능통해 30세 이후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종합상사에서 시작했다. 말 그대로 한 상을 얹어내는 작업들, 이른바 흔적과 추상은 해외 생활을 계획하고 있는 작
국이 상사시대를 거쳐 제조업과 국제화 시대를 견인할 때 그 중심에서 ‘한강 가에게 한국적 정체성을 향한 새로운 실험이자 도전이 되었다. 예술로 영혼을
의 기적’을 만들어낸 일꾼으로 세 아이의 아버지로 건실한 삶을 살아낸 우리 정화하는 작업들을 통해 한 인간이 예술로 마무리 되는 삶을 살겠다는 이홍순
네 아버지이자 한국 현대사의 주역이었다. 은퇴 후 모두가 자신의 삶에 멈춰 작가의 행보는 실존적 삶에 대한 귀감과 동시에 오늘에 안주한 우리 모두에게
있을 때, 작가는 세계 속에 도전하던 당시의 리더십으로 내면의 예술가를 당 큰 감동을 남긴다고 할 수 있다.
당하게 끌어냈다. 삶을 관조하면서도 노년의 새로운 방향성을 개척정신과 리
더십에서 찾은 것이다. 작가는 이것이 해병장교와 상사맨을 했던 과거의 도전 “구도심(폐가 등)의 아카이브를 살리면서도 이것을 다시 재해석하여 나만의
적 성격에서 묻어나왔다고 말한다. 연고도 없던 해외 만국박람회 등에서 자본 세계를 창조해보자. 남들이 갖지 않은 나만의 역사를 만들자. 별난 사람이니
과 기술 등을 도입했던 정신은 한국건설신기술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던 그의 별나게 즐겨보자.” - 작가 인터뷰 중에서
돈키호테같은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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