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2 - 전시가이드 2024년 03월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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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덕 컬럼
북한산, 90.9x72.7cm, Mixedmedia on canvas, 2021
자연의 기개를 품은 북한산의 표현
喜, 1786~1856)의 시선을 끌었고 1816년 추사가 처음으로 비봉에 올라 탁본
을 하여 글자를 읽어냄으로써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추사의
서양화가 김문영 해독으로 비의 내용과 건립연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북한산 비봉에 이 비를 세운 것은 신라 진흥왕의 한강 유역에 대한 확고한 집
글 : 김재덕(갤러리 아트팜 관장 칼럼니스트)
념을 보여준 것으로 볼 수 있다. 북에서 임진강을 건너면 마주하는 고갯마루
에 칠중성이 있고 그것을 내려다보는 감악산에 신라비, 그리고 북한산 비봉
오늘날 서울이 깔고 앉아 있는 큰 돌덩어리는 선캠브리아기(약 5억9,000만 년 에도 비가 있는데 한강을 지키기 위한 신라의 핵심 전략으로 학계는 분석한
이전 시기)에 생성된 화강편마암이다. 그 기나긴 세월의 풍화과정을 견디고 다. 한강을 지켜야 당(唐朝)과 안전하게 통교할 수 있으니 이 북한산비야말
견뎌서 북한산과 관악산의 신선 같은 봉우리가 생성되었다. 북한산은 1억 7 로 대국민 전략 선언이었던 셈이다. 몰자비에서 글자를 발견한 추사는 역사
천만년전에 형성된 최초 마한의 땅이며 삼국시대 백제에서는 한산(漢山)이라 를 발견한 고고학자, 고증가로의 면모를 보여 주는 계기가 되었다. 탁본하는
불렸고 인수봉은 부아악(負兒嶽)이라 불렸으며 시조 비류와 온조 형제가 올랐 과정에서 희미하게 한지에 떠오르는 글자 모양을 보면서 희열을 가지는 추사
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31년 이후 횡악(橫嶽)이라고도 불렸으며 475년 고구려 의 모습이 그려진다.
가 이곳을 정벌하여 북한산군(北漢山郡)이라 칭한다. 신라가 이곳을 정벌하고
(553년) 난 후 557년에 일시적으로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이때 김문영 작가는 20여 년간 북한산을 화폭에 담아 북한산 작가로 불린다. 근작
북한산 정상에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 순수비가 세워졌다. 비봉의 꼭대 에서 작가는 겨울의 북한산을 모티브로 산새를 덮은 순백색의 하얀 산과 청아
기에 서 있던 비석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엄격한 고증을 한 파란 밤하늘의 대비로 자연의 순수함과 영원함을 통해 북한산이 품고 있는
거쳐 경주의 돌로 제작되어 옮겨져 설치된 것임이 밝혀졌다. 장엄한 기백을 화폭에 가득 메우면서 한민족의 웅혼한 기상을 화두로 천착활
동을 하고 있다. 작가 김문영이 20년 넘는 세월을 흰백의 살을 드러내고 있는
애초에 그 비는 신라시대 도선국사가 '무학대사가 한양 도읍을 정하기 위해 화강편마암 봉우리인 북한산을 모티브로 하는 작업의 원천은 추사가 비봉의
이곳에 올 것'이라는 가설을 적은 비로 알려져 왔다. 세월의 풍파로 비문을 읽 몰자비를 탁본하여 진흥왕순수비의 실체를 서서히 발견해 나가는 동질의 희
을 수 없어 '몰자비'(沒字碑: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은 비석)로 생각하고 와전 열을 느끼는 과정에 있으리라 짐작해 본다. 그런 연유인가 작가 김문영의 작
으로 전해져왔던 것이다. 그러던 비가 당대 명필가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 가노트 일면에 추사의 세한도에 대한 청정한 절개와 기개에 매료되어 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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