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9 - 전시가이드 2024년 03월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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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섭, 단청과 콘크리트 No.9, 1969, 캔버스에 유채, 앵그르의 <발팽송의 욕녀>김인환, 단청, 1972, 캔버스에 유채,
140×140cm, 작가 소장 161×13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단청은 대칭(symmetry), 반복(repetition), 점층(gradation)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화려하면서 정제되고 통일된 멋을 보여 준다. 우리 민족이 아끼고 오늘날까지 소중히 이어온 단청의 문양과 형태는
빼어난 조형미와 숭고한 전통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나는 프랑스에서 본 모든 미술의 기억이 무(無)로 돌아가더라도 비트로
신라 시대로부터 이어져 유구한 전통을 지닌 단청은 서양 회화가 우리나라에 (vitraux, 스테인드글라스)에서의 감명만은 간직했으면 한다. 프랑스에서
도입되면서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구체화된 작품들도 많다. 그것을 가장 으뜸의 아름다움을 물으면 나는 서슴없이 첫 손으로 이 비트로를 꼽겠다.
2023년 11월 16일부터 2024년 5월 19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이 같은 비트로를 볼 때마다 나는 우리나라의 단청을 떠 올리곤 한다. 사원의
열리고 있는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이란 전시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내벽에 창으로 색유리를 박은 것이 비트로인데, 우리의 단청은 절의 외벽을
하인두(1930~89)의 <혼불-빛의 회오리>와 <피안>, 전성우(1934~2018)의 < 칠한 단장이지 창은 아니다. 단청은 집안을 비추지도, 안을 밝히지도 못한다.
색동만다라>와 <광배만다라>, 한영섭(1941~ )의 <단청과 콘크리트 No.9>, 안과 밖이 차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단청은 보는 이의 마음에
김인환(1941~ )의 <단청>과 <단청시리즈> 등 단청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고였다가 그 마음이 법당으로 들어가 촛불처럼 안을 밝힌다. 가을에 익는
전시되어 있어 예술로서의 단청을 느껴볼 수 있다. 단풍들이 절간의 경내를 밝히듯 세월에 들린 단청은 벽면을 뚫고 절 안의
법당을 밝히는 것이다. 우리의 단청은 풍우(風雨)의 세월과 더불어 호흡하는
그중에서 하인두의 <혼불-빛의 회오리>라는 작품에 눈길이 끌렸다. 자연이다. 지워지고 으깨진채 색범벅으로 멀그레 할 때, 단청의 미는 고비에
하인두는 1950년대 후반 앵포르멜운동에 참여하면서 한국 추상미술의 든다. 사람의 손길을 떠난 단청을 자연이 맡아 보완을 해 절정으로 몰아가는
새로운 흐름에 동참하였다. <만다라> 시리즈는 60년대 국내 화단에 유입된 것이다.'라고 단청의 아름다움을 예찬하였다. 특히 세월의 흔적이 잔뜩 묻은
옵아트를 수용하면서 불교적 사상을 도입하여 서구적 추상주의에 한국적 빛 바랜 단청을 최고로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 역시 말끔하게 새로
정서를 융합하며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펼쳤다. 즉 단청(丹靑), 불화(佛畵) 칠한 단청보다는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퇴색되고 박락된 단청이 더
등에서 전통적 한국미의 본질과 조형미를 원용하면서 장식적인 색상과 화면 매력적이라고 본다.
구성의 신비감, 그리고 생성과 확산의 상징으로서 불교적 심상(心像)을 작품
속에 구현하였다. 외부의 단청만 보고 화려하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지만 실은 내부의
단청이 진짜 알짜배기이다. 내부 천장의 반자나 대들보, 수미단 등에서 단청의
그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단청에 대한 미의식을 확실하게 진수를 찾아 보시라. 궁궐이나 사찰에서 단청을 보려거든 외부만 보지 말고
알 수 있는 단서를 찾아보자면 1983년에 발간한 '지금, 이 순간에'라는 책의 내부를 꼭 둘러보면서, 장식적인 문양과 함께 회화적인 표현도 잘 살펴보아
146페이지에 실린 프랑스 여행 중 느꼈던 심정을 쓴 글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단청의 매력에 빠져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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