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7 - 2019년전시가이드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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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뷔페, 팔꿈치를 괸 남자, 1947, 살롱 앙데팡당 출품작, ⓒADAGP
'베르나르 뷔페 자살’이라는 톱기사로.
그의 자살은 우리들에게 놀라움을 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천부적인 재능과 독특한 표현법으로 프랑스 사람들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사랑을 받아온
프랑스의 가장 대표적인 화가이며 대중적인 화가였다.
격적인 선으로 그의 명성은 순식간에 유럽에 알려졌다. 그의 나이 28살에는 한국을 찾아왔다. 전쟁이 남긴 폐허와 하루하루 공포를 삼키며 살아야 했을
얼마전 죽은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인 조각가 세자르와 함께 프랑스의 최고 작 당시의 뷔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공허함과 황량함으로 가
가로서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가해 명실상부한 국제적인 작가로 지명도를 득 찬 무의 세상 속에서 이전의 세상이 그랬듯 생명력으로 반짝이는 유를 갈
떨쳤다. 사실 그 이전부터 그의 화풍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만 그는 특별히 망했을 것이다.최악의 상황에서도 예술을 놓지 않고, 그의 손끝에서만큼은 여
어느 한 장르를 고집 하지는 않았다. 그는 꽃도 많이 그렸고 풍경도 그렸고 정 전히 역동적이었던 그 예술로 희망을 그려냈다. 그의 작품들이 많은 이들의 외
물도 많이 그렸다. 그러나 그의 기법은 언제나 동일하고 일관 했다. 놀라울 정 롭고 지친 감성을 대변해 공감을 자아냈다는 점이 더 이상은 놀랍지 않았다.
도로 간결하고 날카로운 선, 힘있는 선들을 바탕으로 한 구성 등으로 그는 불안
과 격분 공포에 대한 거부의 세계를 강렬하게 묘사해냈다. 특히 그는 세계 대전 그의 작품들엔 이러한 감성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
에 대해 민감해 했고 격분했다. 다.대다수 뷔페를 좋아하고 사랑했던 애호가들은 그의 자살을 비통해 했다. 그
리고 일부에서는 화랑이 단순히 뷔페의 명성을 이용하여 그림만 팔아먹었고
1955년 개인전에서 그는 '전쟁의 공포'를 주제로한 작품을 발표 할 정도로 인 그의 작품에 있어 예술적인 평가를 위한 노력에는 무관심 했다고 화랑을 욕했
간적 상황을 고발했다. 이 작품들은 우화적이면서 참혹한 인상을 준 작품들로 다. 그러나, 관련된 작가들의 복지 문제 및 제반 여건의 향상을 위해 기여하기
써 관람객들에게 지대한 충격을 주었다. 시리즈로 제작된 이 대형작품에는, 외 는커녕, 도리어‘제살 파먹기’식 소모에만 집착하는양상이 곧 우리 국내 미술시
부 세계와 단절된 전쟁의 일면을 그려냄으로써 그가 평소에 가지고 있는 전쟁 장의 치부를 고스란히 드러낸 전형적인 화랑 모습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
에 대한 참상과 끔찍함을 호소했다. 마치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위선을 풍자 만, 현실적인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뷔페 자신만이 참담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
했던 오노레도미에처럼 인간의 처참함을 드러냈다. 그의 손이 닿으면 평범하 었던 육신의 고통이,역설적으로 영리를 추구해야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화랑
고 일상적인 풍경, 황폐한 들판의 풍경 등이 격동한듯 힘있는 모습으로 변화 의 입장에서는 어설픈 감성보다는 차라리 냉철한 이성에 기대는 편이 오히려
했다.수직선이 빚어내는 강렬한 선의 힘은 한결같이 그의 작품을 경탄하게 하 본연의 역할에 충실했음을 반증한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시사하는바가 크다.
는 서사적 감동을 주었다. 베르나르 뷔페가 투쟁을 통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했음에 반해, 아무쪼록 우
리 화단의 모든 미술인들은 ‘새로운 정신’을 바탕으로한번쯤이라도 피동적인
공교롭게도 6·25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계절에, <베르나르뷔페전>이 운명에 저항해보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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