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5 - 2019년전시가이드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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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화면 중경을 먹색으로 과감하게 늘어트려 처리한 시도 역시 매우 창의적이 있어 다양한 방향으로 접근해서 신중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겠다.
고 독자적이며 현대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근경의 중심이 되는 논과 논
두렁 그리고 중경의 숲과 산 중턱의 간단한 여백으로 처리된 집 등이 자연스럽 셋째, 〈산천재도〉의 제작장소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정선이 그려낸 〈산천
게 균형, 조화를 이루는 있는 것 역시 아주 매력적이다. 이렇게 정선의 〈산천재 재도〉의 장소는 다름 아닌 조선 중기의 실천유학자인 남명(南冥) 조식(曺植)
도〉에는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그만의 공간 구성력, 대담한 변형과 생략, (1501∼1572)의 산천재이다. 다시 말해 산천재는 조식의 유거와 정사, 후학을
리듬감 있게 반복되는 필선과 미점 등이 돋보이고 무엇보다도 화면에 등장하 가르치던 서원이며 이후에는 선비들의 은거지로 유명한 곳이다. 이와 같은 조
는 모든 경물이 서로 에너지를 보충해 주면서 향토성 짙은 느낌을 받게 한다. 식의 산천재를 정선이 찾아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보다 큰 의미를 가지고 있
한편, 정선의 〈산천재도〉의 화면 왼쪽 윗부분에는 ‘화제(畫題)’와 ‘겸재(謙齋)’ 다. 남명 조식이 누구인가, 조식은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과 함께
라는 그의 호(號)가 적혀 있고 그 아래에 ‘원백(元伯)’이라는 백문방인이 찍혀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선비의 고장인 산청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조
있는데 화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조 명종에게 어진 정치를 바라는 을묘 단성소를 올린 참 유학자로 그에게 많
은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거절하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평생을 보냈다.
내가 산천재에서 사흘을 묵어 그리워하는 정이 있기에 계유년 11월 그믐에 이 그런 까닭에 〈산천재도〉를 계속 감상하다보면, 조식을 떠오르게 되고, 정선이
중원을 위해 등불 아래에서 그리다. 퇴계 이황이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안동의 ‘도산서당'을 모델로 한
겸재 -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윤진영 책임연구원 해석 -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25.3x39.8cm)-시냇물 흐르는 곳 위에 자리를 잡고
고요하게 지낸다’는 뜻〉와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된다. 정선은 어떤 이유로 조
내가 산천재에서 삼일의 시간에 급박하여 계유년(1753) 11월 말 이중원을 위 식의 산천재를 찾았을까? 어떠한 이유에서 〈산천재도〉를 찾았든 간에 〈계상
해 촛불아래서 그렸다. 겸재 - KBS진품명품의 김영복 감정가 해석 - 정거도〉와 전혀 무관한 관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크게 주목받을 것으로 본다.
물론 깊게 생각한 결과일 수 있겠지만, 정선의 〈산천재도〉 를 〈계상정거도〉 도
여어산천재 (余於山天齋) 상에 대입하여 보다 심층적으로 논의된다면, 그 동안 알려지지 않은 당시 상황
유삼숙지연 (有三宿之戀(혹은 급急?)) 을 적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계유복월회 (癸酉復月晦)
위 (爲) 넷째, 정선의 학문적 일면을 가늠해 볼 수도 있겠다. 물론 정선은 성리학에 기
이중원촉하작 (李仲元燭下作) 초를 둔 유학에 능통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나, 〈산천재도〉의 화제
겸재 (謙齋) 를 통해서도 정선의 학문적 깊이를 보다 깊게 접근해 확인할 수 기회가 될 것
으로 본다. ‘유삼숙지연(有三宿之戀)(연연하여 잊지 못함’의 글귀는 《후한서》
※ 산천재(山天齋) :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만년(晩年)에 강학(講學)하던 곳 의 〈양해열전〉에 나온다. ‘삼숙지연’이란 “부도불삼숙상하(浮屠不三宿桑下),
으로 경남 산청군 시천면에 소재함. 불욕구생은애(不欲久生恩愛), 정지지야(精之至也)”를 뜻한다. 이와 같은 짧은
글귀로 정선의 학문적 깊이를 가늠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서화에 있어
※ 삼숙지련(三宿之戀) : 연연(戀戀)하여 잊지 못함을 말한다. 《후한서(後漢 서 시(詩)와 글씨는 모든 작가들이 알아야 하는 기본이기에, 정선의 학문적 깊
書)》 권30 〈양해열전(襄楷列傳)〉에 “승려가 뽕나무 아래서 사흘을 머물지 않 이를 이해하는 대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위의 화제를 통해 정선이 많은 책
는 것은 오랜 시간이 흐름으로 인하여 은애(恩愛)가 생기지 않게 하려 함이니, 을 가까이 했으며 다방면으로 학문이 깊었음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겠다.
정진의 지극함이다 “浮屠不三宿桑下, 不欲久生恩愛, 精之至也.”라고 하였다. 또 다른 한편, 정선의 〈산천재도〉에 대담하게 휘갈긴 서체(書體) 역시 그가 수
십 년에 걸친 활동을 통하여 형성된 고유한 필법의 특징이나 습관이 드러나
※ 계유(癸酉) : 1753년(영조29) 있는 노필(老筆)로, 그의 초기와 중기 및 말기 작품의 서체 변화 전모를 파악,
비교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이와 함께 〈산천재도〉의 謙齋라는
※ 복월(復月) : 음력 11월. 12개의 괘卦를 1년 열두 달에 배속한 십이벽괘설( 호의 관서와 元伯(좌우8mm×상하1cm)이라는 자의 방형주문인장이 그의 다
十二辟卦說)에 기인함. 른 작품과 서로 일치해서 이 역시 그의 만년기의 관서와 인장을 비교할 수 있
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어쩌면 정선의 〈산천재도〉는 그림보다는 위와 같은 ‘화제(그림에 쓰여 있는
글귀)’가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화제를 통 지금까지 정선이 78세(1753년) 때 그린 작품은 발견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
해 〈산천재도〉를 그린 제작시기, 제작동기, 제작장소, 정선의 학문적 수준, 서 렇게 반갑게도 정선의 〈산천재도〉가 발견되어, 정선의 만년기인 78세 전후 상
체 등을 분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화제는 짧지만 다음과 같은 아주 황과 작품에 대해 보다 깊게 접근해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산천재도〉에
중요한 몇 가지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첫째, 〈산천재도〉의 제작시기를 분명 서 드러난 ‘제재’와 ‘기법’ 그리고 ‘화제’와 ‘서체’ 등을 통해 정선에 대한 새로
하게 알 수 있다. 정선은 78세 때인 1753년(영조 29년) 11월 그믐에 경남 산청 운 인식과 가치를 일깨울 수 있다. 물론 그의 대표적인 〈금강전도〉, 〈인왕제색
기슭에 위치한 ‘산천재’를 찾아 그곳에서 머물며 〈산천재도〉를 그려냈다. 추적 도〉, 〈박연폭도〉 등과 같은 장쾌하고 호탕한 필묵법으로 그려낸 것은 아니다.
해보면, 정선이 〈산천재도〉를 그려낸 그해 9월에는 ‘현릉령’에 올라 아주 바쁜 하지만 앞서 충분히 언급한 것처럼, 정선의 〈산천재도〉와 비교해 유사한 상
일정을 보내던 때이다. 정선은 그와 같은 바쁜 일정을 뒤로 하고 홀연히 산천 황을 제재로 한 작품은 지금까지 없었고, 작은 화지인데도 산천재 주변을 적
재를 찾아 〈산천재도〉를 그려냈기에 더욱 각별하게 생각하게 된다. 절히 조절하여 꽉 채워 넓게 보이게 하는 화면 구성력에 의한 전체적인 분위
기가 매우 인상적이며, 전혀 예상치 않은 새로운 취향의 기법표현은 우리 땅
둘째, 〈산천재도〉의 제작동기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정선은 이중원李仲元을 을 그리는 또 다른 정형을 이룩해 놓았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논두렁과 봉우
위해 산천재 풍경을 진경산수화로 그려냈기에 특별한 인상을 가지게 된다. 즉 리 가운데 초가집, 중경의 울창한 숲과 오래된 나무들이 서로 가려주고 비추
정선은 남명 조식의 업적을 기리고 본받고자 산천재를 찾아 3일을 지내는 가 면서 향토성 짙은 강한 기운을 내뽑는 모습은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끝
운데, 이중원을 마음속으로 그리며 등불아래서 붓을 휘날리며 그림을 그려 냈 으로 정선의 〈산천재도〉에 적힌 ‘화제’는 제작시기, 제작동기, 제작장소, 정선
다. 여기에서 계속 궁금하게 여겨지는 것은, 정선과 아주 가깝게 느껴지는 이 의 학문적 수준, 서체 등을 환하게 밝혀주는 자료로써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중원이 누구인가? 이다. 일단은 자가 중원仲元이고 호가 양오헌(養梧軒)인 서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화가 이현곤(李顯坤)(1699∼1743)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차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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