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1 - 2019년08월전시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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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타마라 드 렘피카, 모성애, 1928, 61.0×91.5cm, ⓒADAGP (우) 타마라 드 렘피카, 녹색 부가티를 탄 자화상, 1929, 35×27cm, 개인소장(스위스), ⓒADAGP
화장품의 글로벌 명품들이 즐비해 새 브랜드가 비집고 들어설 자리가 없는 고급 향수 시장
프랑스에서 여성적이고 환상적인 향과 용기 디자인을 내세운 브랜드 명칭은 바로『롤리타렘피카』였다.
자유로운 신여성, 기계문명을 대표하는 자동차와 아름다운 여자, 도시적 삶에 사 ≪태평양≫은 1990년 프랑스에 PBS라는 현지법인을 세워 ‘리리코스’라는
열광했던 렘피카는 이 그림 한 장으로 새 시대를 예고 한 것이 아닐지. 그녀는 기초화장품을 생산했었지만 참담한 실패를 겪었다. 프랑스에서는 기초화장
파리와 뉴욕을 오가며 1920년대 당대 사교계와 예술계에 초상화가로 명성을 품보다 향수나 색조화장품이 인기라는 점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
얻었다. 여기서 타마라는 몇 년간의 정신적 갈등을 겪은 후에 결국 테디우즈와 다.해결책을 모색하던 ≪태평양≫은 ‘현지화’ 전략을 세웠다. 프랑스 향수시장
이혼하는데 같은 해인 1928년에 자신의 그림을 아껴주는 컬렉터인 라울커프 을 공략하기 위해 자본만 제공할 뿐 기획, 디자인, 제조 및 판매를 모두 프랑스
너 남작을 만난다. 미국의 30년대 예술계를 우울하게 휩쓸었던 대공황 시기에 현지인들에게 맡기기로 한 것이다. 특히 태평양의 현지법인 ≪PCP≫는 당시
도 계속해서 작업을 이어 나가는 동시에 파리의 다양한 갤러리에서도 전시회 ≪크리스찬디오르≫이사이자 글로벌 화장품 업계의 전설적인 영업 통카트린
를 가졌다. 30년대 말엽, 타마라와커프너는키제트를 유럽의 외할머니에게 맡 도팡을 이 회사의 최고경영자로 영입했다. 그녀는 소비자들에게 낯선 새로운
긴 채 주로 헐리우드에 머물렀다. 이 시기에 접촉한 로스엔젤레스에 위치한 ≪ 브랜드를 만드는 대신 유명 디자이너와 손잡았다. 바로 그녀의 이름 ‘로리타렘
폴 레인하트 갤러리≫는 그녀의 작품을 독점 전시하는 영광을 베풀어 준다. 유 피카’를딴 브랜드로 시장을 공략하는 전략을 택했다. 당시 롤리타렘피카는 주
럽이 한창 제2차 세계대전의 늪에 빠져가던 1940년대 초반에, 키제트가 미국 목 받는 신예 디자이너로 그녀의 작품들은 동화를 연상시키는 순수함과 사로
에 거주하던 엄마와 의붓 아빠에게 합류한다. 심리적으로 안정된 타마라는 뉴 잡힐 듯한 관능미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프랑스는 화장품에 관한 글로벌 스탠
욕의 ≪쥴리안레비 갤러리≫에서 독특한 전시를 개최했다. 이를 계기로 그녀 더드를 확보하고 있어 세계적 화장품 회사들이 최고의 인프라를 바탕으로 치
의 인지도가 급 도약하면서 매우 왕성한 예술활동이 지속된다. 모녀 사이에 흐 열한 경쟁을 벌였다. 프랑스에서의 성공은 곧 글로벌 경쟁에서의 성공을 의미
르던 절묘한 애증 관계는 1980년 3월 18일 타마라가 사망하자, 평소 어머니 하기에 태평양의 글로벌 브랜드 전략은 성공적으로 평가 받는다. 성공적 결과
의 소원대로 멕시코의 쿠에르나바카 산맥에 그녀의 재를 뿌려줌으로써 극적 를 위해서는 국적도 과도한 자존심도 실리를 위해 과감하게 포기하는 야심찬
으로 화해 하기에 이른다. 결단이 필요하다는 생생한 교훈을 제공하고 있다. 아무쪼록 우리 미술 생태계
에서도 경영의 혁신을 통해 ‘새로운 정신’을 과감하게 벤치마킹 함으로써 미래
다시 화재를 한국 시장과 글로벌 브랜드와의 역학관계로 돌려보자. 화장품 회 지향적인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였으면 하는 바램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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