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9 - 전시가이드 2020년 05월호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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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드로잉 작업에 열중하는 트레이시 에민




            기에 당시 많은 사람들이 당황했지만 그로 인해 후보에 그쳤던 에민의 작품이       올해 3월말에 론칭한 신생 ‘공유경제 미술품 투자기업’ ≪피카프로젝트≫는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 되었다. 구겨지고 주름이 잡힌 시트와 더러운 속옷이 침      서울시 강남구 ≪피카갤러리≫에서 트레이시 에민의 회화 작품인 『나는 너를
            대 위에 널부러져 있고, 주변에는 담배꽁초, 보드카 병이 방치된 채 휴지조각      사랑할 것을 약속해』를 공동 소유하는 프로젝트를 4월 27일까지 진행했다. 모
            들과 함께 이리저리 뒹군다. 게다가 피임용품, 알약, 사용된 콘돔과 임신 테스     름지기 ‘초 저금리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기존의 ‘주식 거래’
            트기 등 성관계와 관련된 물건들도 어지럽게 놓여있다. 우리가 뻔뻔한 관중의       나 막연히 ‘부동산 대출’에 의존하는 투자 방식은, 너무나 위험 부담이 클 뿐 아
            입장에서 이 작품을 대하는 순간, 낯이 뜨겁기는커녕 부지불식간에 관음적 시       니라 자산 안정성마저 떨어지는 판국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 등장한 필수 아
            선으로 보게 된다. 오히려 그녀의 알몸 혹은 관계 장면마저 상상하게 되는 것      이템이 바로 미술작품을 통한 재테크이다. 이른바 <아트 테크>가 알찬 투자
            이다. 실제로 그녀는 저 침대에서 성관계를 가졌고 다음날 전시회장에 그대로       방법으로 전문가들 사이에서 새롭게 인식되면서, 세인들의 주요 관심사로 떠
            옮겨 놓았다고 한다. 바로 현장의 잔해 물을 통해 있는 그대로 자신의 내밀한      오르고 있다. 예술 작품은 공장에서 대량생산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시장의 수
            부분인 과거의 트라우마를 숨김없이 폭로하면서 그로부터 감정적 해소(카타         요가 증가하면 가격이 올라간다. 이를 이용한 재테크 방식이 바로 <아트 테크
            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매우 정직한 ‘감성의 전도사’였다. 마치    >다. 이러한 트랜드에 발맞춰 ≪피카프로젝트≫는 미술의 대중화와 국내 미
            ‘이별의 고통’을 가슴 속에 승화시키기라도 한 듯 『네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술시장의 세계화를 목표로 미술품 유통구조를 개선하고 누구나 미술에 대한
            여기서 날 떠나지 말아 달란 말이었어』라는 다소 신파 조의 우스꽝스러운 제       관심과 투자까지 손쉽게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공동소유 프로그램을
            목을 붙여 전시회장 중앙에 당당히 배치했던 파란 오두막은, 트레이시 에민과       기획했다는 것이다. 관련 업체에 따르면 미술품 공동소유프로그램은 고가의
            그녀의 남자친구 매트 콜리쇼가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구입한 오두막과 닮       미술품을 2년이라는 제한 기간을 두고, 소액으로 미술품을 부분 소유하고 미
            아있다. 1999년 휴가를 보낸 후 콜리쇼는 에민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떠난다.     술품 판매를 통한 수익을 지정해 받는 구조다. 구매한지 2년 이내에 생성된 상
            그녀는 실연의 아픔이 녹아있는 장소를 대중에게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내 안        승 가치에 한해서 20%의 수익을 제공한다. 여기서 부대 조항으로 주목되는
            의 상처를 밖으로 꺼내겠다는 선언을 한 셈이다. 그녀는 언제나 이러한 방식       사안은, 지정기간 내 공동소유 미술품이 재 판매되지 않을 경우 회사에서 역
            으로 스스로를 치유했다. 그녀의 네온 작품들 역시 솔직하다. 그녀의 모든 작      매입해, 부분 소유주에게 사전에 정한 기본 수익률 20%를 나눠준다는 점이
            품들이 일관된 방식으로 표현되지만, 네온을 이용한 작품에서는 자기가 하고        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위기 상황에서나마, 아무쪼록 서로서로 웃으면서 희
            싶은 말을 그대로 적어 놓았기 때문에 더 직접적이라 할 수 있다. 만일 누구나     망과 기회를 공유하는 가운데, 모두가 공생할 수 있는 ‘새로운 정신’이 우리 미
            한번쯤은 속으로 생각했었던 감정들, 말들이 억제되어 있었다면 당연히 보는        술생태계에도 스며들기를 진심으로 기대해 본다.
            이들의 전전긍긍 속앓이 마저 시원하게 풀어주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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