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5 - 전시가이드 2020년 05월호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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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권 컬럼
(4) 순수 작가들의 민화 응용과 차용 3기
(1991〜2000)
1990년대 민화는 순수 작가들에게 독자적
회화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데 영감이자 동
력이었다. 그들은 민화를 차용해 삶과 죽음,
꿈과 욕망, 치유를 위한 메시지를 담았다. 이
렇게 1980년대에 이어 1990년대도 순수 작
가들은 더욱 더 전통장르와 맥을 같이 하였
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황창배, 이만익, 이왈
종, 백남준, 김용철, 김종학, 김정, 전혁림, 최
영림, 이종상, 이화자 등으로, 이들은 전통적
인 제재를 차용하면서도 그것을 자기만의
조형언어로 표현해 좋은 평가를 얻어 냈다.
황창배(1947〜2001)는 한국 전통 민화의
세계를 빌려오고 응용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는 민화의 형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
다는 민화가 지향한 순수한 소망을 새롭게
상기시켜 주었다. 그는 한국화의 수묵 기법
과 민화의 채색 기법을 뒤섞어 놓고 무의식
적인 순수한 조형언어로 표현했다. 즉 그는
무의식적으로 화면을 구성하고 그 화면에
어울리게 인간의 모습이나 나무, 꽃, 새 등
의 구체적인 형상을 그려 넣는 방식을 선택
했다. 이와 같은 황창배의 작품 제작 방식에
는 백생광이 큰 영향을 끼쳤다. 즉 황창배는
박생광처럼 민화, 불화, 무화 등의 도상과 화
면 구성 및 강열한 채색의 주술성을 차용하
여 현실에 맞는 건강한 생명력을 불어 넣었
다. 이렇게 1970년대에 김기창, 장욱진이 그
리고 1980년대 박생광 등은 민화를 끌어들
여 독자적인 세계를 구현한 것처럼, 1990년
대 황창배는 민화 양식 참다운 민족적 양식
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이만익은 해학과 정서가 담긴 옛날의 민담,
설화, 탈춤, 판소리 등을 강한 선과 화려한 색
채로 시각화하여 누구나 편안하게 즐길 수
있게 하였다. 그는 고구려 건국신화의 주몽,
심청의 효심, 흥부일가 등의 친근한 인물들
을 민화적으로 그려 냈는데, 화면 속에는 언
제나 강한 선이나 파스텔 톤적인 색으로 형
태가 구획되어져 있으면서도 대부분 자연스
럽게 움직이거나 말하고 웃고 있으며 이야
화조도, 27×19cm, 조선민화박물관 소장 기 거리가 많게 느껴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왈종(1945〜) 화의 새로운 변용을 보여준 작업을 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
다. 그의 작품에는 인간과 동물 그리고 식물 등이 하나가 되는, 저마다의 독자
민화를 차용, 응용한 적인 절대가치를 인정하는 평등한 관계가 해학적으로 펼쳐져 있다. 그의 작
품에는 대부분 장수를 상징하는 나비가 날고 부부 금실을 뜻하는 새들이 쌍
을 이뤄 지저귀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작품 대부분은 민화기법에서와 같이
순수 작가들.Ⅶ 원근법이나 명암법이 무시되어 있으며 시점이나 공간설정 역시 자유롭고 해
학적이다. 그의 작품을 깊게 접근해 보면, 문인화에서 엿보이는 탈속과 은거
의 취향이 가득 스며들어 있고, 그 위에 민화가 표상하는 신화적이고 토착적
글 : 김용권(겸재정선미술관 관장) 인 세계관과 주술적 생사관, 그 도상들 또한 가득 차용되어 있다. 불교 미술
의 장엄미도 몇 겹으로 얹혀 있는가 하면, 그 위로 우리 전통 미술의 여러 흔
적이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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