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3 - 전시가이드 2021년 06월 이북
P. 33
면서 답을 숨겨놓은 것도 같은데, 그 숨김이 사실적이어서 시각적으로 오히
려 난해하다. 감상자가 이 속에서 단서를 찾아나가면 되는 것인가. 여기에 작
가가 말하는 맥거핀적 허수가 존재하는가. 아니면 이것이 메타포적 상징인가.
내 작업은 아이러니하게도 촉각을 통해 시각적 일루전이 생성된다. 신화 속 오
이디푸스, 눈먼 사람들이 이끄는 다른 눈먼 사람들, 메두사, 사람과 동물의 하
이브리드, 위치의 전치(轉置), 동양의 소나무와 서양의 유칼립투스의 교차, 혹
은 포스트 모던 이미지나 일루전의 배열들은 모두 맥거핀(Macguffin)적인 이
눈먼 자의 숲에서 메두사를 보라_181x227cm_oil on canvas_2019 세상을 고찰하려는 목적에 따른 것이다. 나의 숲은 굉장히 복잡하고 감각적인
디오니소스의 숲으로, 아폴론적인 시각, 광기, 촉각성을 내포한다. 내 작업은
감각의 붓질로 이루어진 ‘비규정성(indeterminancy)의 공화국’이다. 단서는
있으나 찾을 수 없고, 가까스로 찾는다해도 돌아나오기 어렵다.
하고 난해해지는 구성과 스토리라인으로 인해 작품을 논하기가 쉽지 않다. 이 처음 접했던 작가의 작품이 ‘실존 공간’이었다. 여기에서도 실제적 공간과 허
컬럼에서 작가의 ‘눈먼 자의 숲에서 메두사를 보라’ 시리즈를 선정한 이유는 상의 공간이 혼재된 가운데 알 수 없는 선이 등장한다. 이 선들은 이후 현재까
무언가를 덮어 가리는 듯한 붓질 위에 서로 관련없이 흩뿌려놓은 듯한 이미지 지 더 굵고 더 강하게 구불거리며 스토리를 끊거나 흩어놓듯이 보이는데, 작
들, 숨겨놓았지만 보이는 것도 안 보이는 것도 아닌 비밀 코드들 때문에 감상 품들간 공통성을 부여하는 기호같기도 하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보이는 이 선
자가 찾아야 할 것도 작가가 밝혀야 할 것도 많아 보여서다. 눈먼 자의 숲, 눈 들이 작가의 시그니처 같이 느껴진다. 이 선의 역할은 무엇인가.
을 가린 사람들, 메두사를 보는 즉시 죽음을 면치 못하는 아이러니한 역설 관
계 속에서 인간이 쉴 곳은 있는지, 있다면 그곳이 어디인지 의문과 질문이 꼬 내 작업에서는 어떤 내러티브건 중요하지 않은데, 이는 붓질을 위한 하나의
리를 문다. 다음은 작가와의 대화이다. 맥거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작업에 등장하는 폭포는 그저 흰색의 자율적
인 움직임이고, 죽음을 통해 자율성을 획득하고 개인성을 갖게 되는 오필리아
‘눈먼 자의 숲에서 메두사를 보라’와 ‘낯선 숲의 일탈자들’ 시리즈는 서로 어떻 의 연못도 그저 푸른 물감으로 덮인 화면이다. 물감으로 덮인 화면, 즉, 가장
게 연결되는가. 혹은 연결할 수 있는가. 효과적이고 가장 다양하며 가능성이 큰 잠재태(dynamis)를 만들기 위해 붓질
의 마찰 계수를 0도로 만드는 데 주력한다. 이를 위해서는 밑칠한 캔버스 위에
두 시리즈에서 공통된 주제는 질료의 운용과 관련된 시각중심주의(ocular- 계속적으로 기름칠을 하는데, 이는 빙판이 더 매끄럽도록 위에 살짝 물을 붓
centrism)와 남근중심주의(phallocentrism)적인 촉각성의 부활이다. 이는 는 것과 같은 이치로, 여기에는 기름칠 위에서 중심을 유지하려는 의지, 자율
피부, 어머니의 자궁, 꿈으로 표현된 미지의 세계, 장자처럼 이 세상을 한바탕 적으로 미끄러지는 우발성, 미끄러짐이 예견되는 공포감이 포함된다. 붓질은
의 꿈(胡蝶之夢)으로 상정하는 것들과도 관계된다. 내 작업에서는 이야기가 캔버스 위 걸쭉한 질료들과 지속적인 접촉을 통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상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는 항상 억압된 욕망과 관련된다. 욕망을 억압하는 보다 빠르게 미끄러지는데, 촉각성, 즉각성, 희열감도 느끼게 된다. 이렇게 감
세력들은 실제계의 문화, 자의식, 기억, 종교에 끊임없이 침투하고 관여하여 각의 집합체인 숲은 나무, 동물, 숲, 집, 폭포들의 리트로넬로(ritornello)라 할
의식의 흐름을 변화시키는 권력을 지녔기 때문에, 내용이 감지당하지 않도록 수 있다. 이 위에 다시 정리된 것에 대한 반동으로 의미가 전환되거나 박탈된
이야기 순서를 바꾸기도 한다. 히피족, 하위문화 사람들, 전위예술가들은 이 리좀(rhizome)의 줄기들이 반대급부로서 나무, 바위, 사람의 외형을 감싸면
러한 욕망의 표출에 큰 기여를 해왔다. 심연에 고착된 욕망은 짤, 밈(meme), 서 전체 화면을 규정짓는 역할을 한다.
패스티시(pastiche), 하위문화의 형태로 위장되기도 하는데, 사회가 발전하면
할수록 문제들이 해결된다면 유토피아가 구현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역시 만만치 않은 대화이다. 작가는 나의 이해를 위하여 작업과 관련한 다양
억압적인 세력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언케니(uncanny)하게 조금만 변화되 한 자료를 퍼주었다. 작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빙산의 일각이었다.
어야 하는데, 너무 눈에 띄면 쉽게 표적이 되기 때문이다. 감각적 욕망의 표출 예전에 보았던 공간의 구조와 상관없이 제시된 매력적인 선들은 이제 화면에
은 세미오티케(Sèméiotikè)로 가능하며, 이는 예술문화가 담당할 수밖에 없 서 가장 강력한 리좀 줄기로 변환되었다. 그러나 그 외의 모든 구성들은 철학
다.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가장하여 의식을 지배하는 무의식의 실제계를 벗어 적 개념에 기반하여 맥거핀적 단서와 메타포적 상징으로 얽혀 있다. 작가는
나는 것, 즉, 억압에서 탈주하여 욕망을 표출하는 것, 이는 반복과 자기회복의 이야기가 중요하지 않다고 했지만 철저히 이야기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
루틴을 지닌 일상과는 다르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일탈자가 되는 길이 최선 으며, 생태학적으로 연결된 리좀의 줄기들은 서로 연결되지 않은 채 제시되
이다. 일탈은 실제계에 대비되는 자연계의 행동으로, 억압을 풀고 균형을 맞 어 있어 실수와 허수를 구별하기 어렵다. 작가는 앞으로 감각, 미끄러지는 액
추기 위한 자연의 행위이며, 자연의 일부로서 감각의 표출처럼 반드시 수행해 체의 유동성을 평면이나 영상 작업으로 풀어나가거나, 이를 말로 설명하는 등
야 될 해방구라 할 수 있다. 의 불가능한 교환과 관련된 작업을 계획 중이라고 한다. 작가는 나의 이해와
는 상관없이, 아니, 감상자의 이해를 바라거나 기다리지 않고 달려나간다. 작
구기수(2016)의 평을 보면 작가의 작품들은 “어떠한 답변도 동반하지 않는 가는 나와 같은 감상자를 기다려줄 것인가. 그렇다고 생각되지 않지만, 작가
끊임없는 시각적 질문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 작품에서는 스스로 질문하 의 전시는 끝까지 찾아갈 것이다.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