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6 - 전시가이드 2021년 06월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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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현 컬럼
(좌) 공공주문 천장화 일부배경 기념사진, 앙드레 말로 문화부 장관과 마르크 샤갈 (우) 꽃다발 속의 거울, 1964년 9월 23일 공개한 파리 국립오페라극장 천장화 제목 ⓒADAGP
에스프리누보 이셰 하츠켈레프 세갈. 이후 ‘큰 걸음’이라는 뜻의 ‘샤갈’로 성을 바꾼다. 유대
인 출신인 샤갈은 1907년 상트 페테르스부르크에 있는 ≪짜반체바 왕실미술
새로운 정신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다. 자연주의적 화풍의 그림을 그렸던 샤갈은 그곳에
서 벨라 로젠필드를 우연히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샤갈은 그의 자서전
「나의 삶」에서 “마치 그녀는 나의 어린 시절과 부모님, 미래를 모두 알고 있는
글 : 김구현 (AIAM 미술 경영연구소 대표) 것 같았고, 나를 관통해 볼 수 있는 것 같았다”라고 회상했다. 보석상을 운영
했던 부유한 집안의 막내딸인 벨라 로젠필드는 샤갈보다 아홉 살이나 어렸다.
그녀는 전국 3% 이내의 성적 우수 학생들만 입학할 수 있었던 모스크바 ≪게
리에르 여자대학교≫에 다니던 수재였다. 가난뱅이 집안의 청년 화가와 부유
1962년 2월 당시 문화부 장관 이었던 앙드레 말로가 발레공연 「다프니스와 클 한 집안의 딸 사이의 교제 사실은 작은 유대인 마을에서 입에 올리기 좋은 화
로에」 관람차 파리 오페라 하우스를 방문했을 때, 천장에 본래 그려진 그림을 젯거리였다. 1910년 샤갈은 파리로 유학을 떠나 ≪쥘리앙 아카데미≫에서 공
지적 하였다. 원래 천장에 그려져 있었던 질 유진 르네프뵈의 『요정들과 밤과 부하면서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입체파> 화풍에 영향을 받으며 피카소
낮의 시간의 신들』은 혼란스럽지 않고 고전 건물에 완벽하게 걸맞았다. 그렇 와 같은 작가들과 교류한다. 그의 작품들은 독일의 아트딜러들에게 관심을 불
지만 앙드레 말로는 무엇인가 독특하고 현대적인 신선한 자극을 원했다. 결국 러일으키고 몇 번의 전시를 성공적으로 치르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된
30년 절친 마르크 샤갈이 갖고 있는 난해하고 원초적인 영감에 힘을 실어주 다. 전시회가 끝난 1914년 러시아로 돌아온 샤갈은 벨라와 결혼하기 위해 그
었다. 보수 관료들과 언론의 냉담한 반응을 무릅써 가면서 ≪파리 오페라좌≫ 녀의 부모님을 찾아가 간신히 결혼 허락을 받고 1915년 결혼식을 올린다. 그
천장의 ‘재 창조’를 시도한 것이다. 리고 그 해 세기의 명작 『생일(1915)』을 발표한다. 도발적인 원색이 눈에 띄는
는 사랑하는 사람과 있을 때 마치 하늘을 날고 있는 듯한 샤갈의 순수하고도
우여곡절 끝에 1964년 9월 23일 프랑스 파리 오페라극장은 ‘색채의 마술사’ 마 강렬한 기분을 감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후에도 그는 사랑의 몸짓과 꽃
르크 샤갈 고유의 천장화를 대중들에게 공개하였다. 마치 ≪에펠탑≫의 건설 들로 가득한 『아름다운 여인들』연작을 발표하는데, 이는 모두 자신에게 영감
을 반대한 문호 모파상과 당대의 좌파지식인들의 거센 파도를 극복한 사례와 을 준 뮤즈인 벨라를 향한 헌정 작이었다. 결혼 2년째 접어든 해인 1917년 러
흡사하지 않은가. 세월이 흘러 오늘날에는 전 세계 각국에서 파리로 몰려든 관 시아에서 발발한 10월 혁명은 샤갈의 작품세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는 “프
광객들의 ‘필수 방문코스’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 새삼 역사의 아이러니가 느껴 롤레타리아 화가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이 사회에 속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고
진다. 현 벨라루스 공화국 비텝스크 태생의 마르크 샤갈은 생선을 팔았던 아버 선언할 만큼 현실세계의 이해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했다. 그 이후 러시아를
지와 채소장수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아홉 형제 중 첫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모 떠나 베를린과 파리 등을 떠돌며 망명생활을 하지만 그의 이런 태도는 주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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