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2 - 전시가이드 2021년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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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덕 컬럼





































                  은혜 얼굴 가면




         산대희(山臺戱)의 전통계승                                 산대는 목재와 종이가 주재료 로 약한 내구성과 크기에 따른 보관 장소의 부재
                                                        등 재사용의 어려움이 있어 행사 후 폐기하고 해마다 다시 설치했으며, 이 때
        종이공예가 엄 정 애                                     문에 인력동원. 목재확보, 각종 재료 준비에 어려움을 겪게 되며 과도한 비용
                                                        소모의 부담이 작용되었음과 함께 각종사고 등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이러한
                                                        관리의 문제들이 산적하면서 관에서 주도하는 산대는 인조 때에 관련 도감이
        김재덕 (갤러리한 관장, 칼럼니스트)                            폐지되기에 이르르며 산대의 규모가 점차 약화되다가 영조 이후에 이르러 완
                                                        전히 폐지되었다. 산대문화가 사라지면서 산대희를 이끌었던 수많은 전문 예
                                                        인패들은 민간으로 연희 장소를 옮겨 마을 단위의 단위별 놀이 문화로 명맥을
        산대희(山臺戱)는 고려시대부터 설치한 산대(山臺)라는 대형 야외 임시무대        이어 가게 된다. 조선 후기에 산대가 폐지되면서 탈놀이만 민간화하여 서울의
        와 그곳에서의 가무악 및 시사적인 사건을 우스갯소리와 우스갯짓으로 표현         본산대로 전승되다가, 이후 서울 인근 지역에 전파되어 정착되었다. 서울의 애
        하여 연출한 풍자적인 연극 등의 잡희(雜戱)를 열었던 것에서 연유한다. 산대      오개와 사직골 인근의 거리에서는 ‘본산대놀이’라 불리는 가면극이 성행하였
        (山臺)는 산과 같이 거대한 임시 무대로 고려 초부터 이미 전승되었다. 산대가     으며 오늘날 양주, 퇴계원 등 경기지역에 남아있는 ‘산대놀이’가 바로 이 산대
        설치되는 시기는 매우 다양했다. 대체로 고려시대에는 팔관회와 연등회 때와        희라는 명칭에서 유래한 탈놀이를 말하는데 이는 오래전부터 계승되어온 전
        궁중의 새해맞이 축귀(逐鬼) 행사인 나례(儺禮)시기 및 사찰과 관의 행사 등이     통길놀이 이며 우리나라 거리 문화축제(festival)의 원초이다.
        열리는 시기에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중국 사신의 영접시기와 연말 나례,
        궁의 행사, 국가적 경사와 연회시에 설치되었다. 산대놀이는 민속놀이이자 민       엄정애 작가가 건넨 명함엔 본인의 이름대신 ‘366일 인형만드는 인형엄마’로
        속무용으로 주요 구성이 되었고 산대놀이에서 각종 연희를 담당하던 놀이패         인쇄 되어 있다. 작가의 작업실은 일년도 모자라 하루를 더한 366일을 인형과
        는 주로 성균관 소속의 노비인 반인(泮人)들로 구성됐다. 산대는 고정된 대형      함께 고락을 해온 45년 세월로 켜켜이 쌓였다. 인형엄마라는 애칭은 그녀가
        산대인 대산대(大山臺)부터 이동식인 예산대(曳山臺), 기타 화산대(火山臺),      인형작가로서의 길을 걸을 수 있게 영향을 심어준 정신적 스승이신 곡성출신
        다정산대(茶亭山臺), 주산대(舟山臺) 등으로 다양하다. 산대의 규모는 매우 큰     하회탈 기능보유자 故석운(夕雲) 윤병하 선생이 붙여 주었다고 한다.
        데, 고정 산대의 경우 주요 기둥만 25m 이상이어서 대략 7층 높이의 규모로
        소형 아파트가 네 채 정도 세워져 있는 규모였다. 바퀴를 달아 이동하며 잡희      그녀는 1976년경 인형극 전문 극단에 활동을 시작한 계기로 인형 소품과 무대
        를 하였던 움직이는 예산대는 고정 산대의 절반 크기로 제작 되었다. 1725년(    디자인을 접하게 되었다. 인형극에 필요한 인형들을 시나리오에 맞게 하나하
        영조1년) 아극돈(阿克敦)의 ‘봉사도(奉使圖)’라는 화첩에 그려진 산대의 무대     나 직접 제작하고 공연을 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된 데이터 없이 직접 시행착오
        를 보면 탈놀이는 지상에서 연희되고 있다. 곧 탈놀이, 땅재주, 줄타기 등은 지    를 거치며 단원들과 함께 황무지를 개척해 나갔다. 그러나 고난한 보람을 찾기
        상에서 이루어지며, 각종 춤, 노래, 연극 등은 산대 무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도 전에 컬러텔리비젼이 나오면서 경험치가 쌓였던 단원들이 흩어지게 되고
                                                        극단은 해체를 하게 된다. 엄정애 작가는 전통인형을 만드는 작업의 맥을 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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