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1 - 전시가이드 2023년 04월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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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 정자각 정전의 단청 머리초 정릉 정자각 배위청의 단청 머리초
tiste Siméon Chardin, 1699~1779), 야콥 반 훌스동크(Jacob van Hulsdonk,
1582~1647), 앙리 팡탱 라투르( Henri Fantin Latour, 1836~1904) 외에도 수
많은 작가들의 작품이 즐비하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도 놀라운 정물화가 있었다. 조선에서는 네덜란드 정물화
보다 한 세기 늦은 18세기 후반에 민화에서 정물화로 볼 수 있는 장르가 성행
하며 석류가 그려졌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 발달한 민화는 조선이 문화적 변
화를 여실히 보여주는 시대의 표상이었다. 이렇듯 석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전부터 회화의 소재로 널리 쓰여왔다.
그러나 단청에서 석류의 등장은 구체적으로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민
화보다 훨씬 앞선 고려 시대부터가 아닐까 생각된다. 석류는 씨가 많은 과일
이어서 예부터 다산과 풍요의 상징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단청이나 민화, 도
자기, 침구, 가구의 문양 등의 소재로도 많이 등장한다. 조선시대에는 석류나
포도가 열매를 많이 맺는 것처럼 자손을 많이 낳기를 기원하면서 특히 혼례 때
입는 옷인 활옷이나 원삼 등에 석류나 포도 등의 문양이 많이 쓰였는데 특히
아들을 많이 낳아 자자손손 번성하기를 바라는 기복적인 뜻이 강하게 담겨있
다. 불교에서도 생명을 잉태하고 자손 번영의 의미를 상징한다. 머리초의 석류동
조금은 벗어난 이야기일지는 모르지만 석류에 대한 또 다른 에피소드를 들자
면 '석류의 도시'인 스페인의 그라나다(Granada)가 있다. 711년부터 1492년 를 모티브로 한 공공 기물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언어에서도 그라나다
까지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인 무어인들이 그라나다를 정복한 후 781년 (granada)를 보통명사로 쓰면 '석류'이고, 석류와 비슷한 모양을 한 '수류탄'
간 지배하였는데 처음에는 카르나타(Karnattah)라고 부르다가 나중에 이곳 도 '그라나다'라고 한다.
에 석류와 흡사한 식물이 자란다고 하여 가르나세(Garnache)라고 개칭하면
서 석류를 상징하는 도시가 되었다. 1492년 이사벨 여왕에 의해서 레콩키스 이 찬란한 봄이 가기 전에 조선 왕릉을 모두 돌아보려고 한다. 여러분도 지하
타(Reconquista)가 완성됨으로써 기독교 세력에 의해 이베리아 반도에서 최 철 2호선을 타고 쉽게 갈 수 있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선정릉에 가서
후까지 남아있던 이슬람 세력이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1833년까지 존립했던 조선왕릉의 정자각을 둘러보며 단청을 감상하면서 석류동을 찾아보는 즐거
그라나다 왕국에서도 석류를 국기와 문장의 상징으로 삼았으며 지금도 석류 움을 누려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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