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5 - 2020년 12월 전시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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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수염도 멋스러워 배우라고 해도 믿겠습니다. 또 기품 있는 제스처나 고급스
『Keeping an Eye Open』(국내 출간명 : 줄리안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산책) 런 패션을 보면 돈 많은 귀족 같기도 합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19세
으로 친숙합니다. 소설가답게 화가와 그림에 대한 해석이 마치 한편의 단편 기 유럽에서의 의사라고 하면 과중한 진료와 수술에 찌든 모습을 떠올리는 게
소설을 읽는 것처럼 매우 서사적이지요. 그림에 대한 반스의 안목은 미술평 보통이지요. 그런데 그림 속 닥터 포지는 의사라는 직업적인 정체성을 징표하
론가를 방불케 합니다. 는 흰 가운도 입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가 입은 옷은 붉은색 가운입니다. 병
반스의 신간 『The Man in the Red Coat』이 제 눈을 잡아끌었던 건 표지를 장 원에서 항상 보는 게 혈액이라서 그런지 저는 붉은색 계열의 옷을 입는 게 주
식한 그림 때문입니다. 빨간 외투 속에 사람이 없습니다. 반스는 이 책에서 투 저되는 데, 닥터 포지는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그가 있는 곳도 부산한 진료실
명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걸까요? 표지만 봐도 미스터리한 이 책의 주인 이 아니라 집에서 한가하게 그림의 모델을 서고 있습니다.
공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합니다.
아무나 쉽게 소화할 수 없는 붉은색 가운을 입고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화가들이 흠모했던 남자 이 남자, 예사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그림 속 외모에서 짐작되듯이 닥터 포지
책 내용에 관한 직접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이 책이 국내에 는 19세기 프랑스 사교계에서 이름난 멋쟁이이자 바람둥이입니다. 그는 당대
출간되기도 전에 자칫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그저 책 표지로 의 사랑꾼답게 ‘닥터 러브(Dr. Love)’라는 닉네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심
사용한 초상화와 모델, 그리고 그의 연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뿐이 지어 ‘장미의 리그(League of Roses)’라는 살롱(모임)을 만들어 사교계의 많
지만, 아무튼 글의 시작에 앞서 국내에 계신 줄리안 반스의 애독자 분들께 양 은 여성들과 교류했지요.
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닥터 포지의 자유분방함은 그의 출생과 성장 배경에서 비롯합니다. 신교도 목
오른쪽 그림은 책 표지에 사용된 이미지의 원작입니다. 존 싱어 사전트 사의 아들로 태어난 포지는 어려서부터 개방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랐습니다.
(John Singer Sargent, 1856~1925)라는 화가가 그린 <집에서의 닥터 포지> 프랑스는 종교개혁의 열풍 속에서도 가톨릭의 위세가 굳건해 여전히 신교도
라는 그림입니다. 제목에 붙은 ‘닥터’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림 속 모델은 를 탄압했지만, 포지의 가정은 다행히도 화를 면했던 모양입니다. 닥터 포지
뜻밖에도(!) 의사입니다. 사무엘 장 포지(Samuel Jean Pozzi, 1846~1918)라 는 성인이 되어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는데, 이때도 잘생긴 외모와 치명적인
는 프랑스인으로, 산부인과와 외과를 담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림만 보면 모델 (!) 매력으로 주변에서 ‘사이렌(siren : 그리스 신화 등장하는 인어)’이라 불릴
의 외모와 의사라는 직업이 잘 매칭되지 않습니다. 얼굴부터가 대단한 미남이 정도로 인기가 많았습니다.
이 코너는 칼럼니스트의 의도하는 바를 존중하며 경어체를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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