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6 - 2020년 12월 전시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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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과 컨템포러리 아트




























        기념비전 전경











        세종로 기념비전 앞에서                                    을 하였고, 창방 하부와 기둥마다 장식한 낙양에는 단아하면서 기품이 넘치
                                                        게 단청을 하였으며, 내부 천장에는 왕을 상징하는 쌍용이 그려져 있다. 창방
        단청을 생각하다.                                       과 평방의 머리초에는 계풍에 금문까지 넣은 단청을 하였는데 경복궁이든 창
                                                        덕궁이든 궁궐 안에 있는 건물에서는 금문이 쓰인 단청을 본 적이 없다. 궁궐
                                                        밖 건물이지만 금문까지 사용한 것은 이례적이며 여느 궁궐 단청보다 더 지나
                                                        치게 화려함을 과시하는 듯 보인다. 하늘을 향해 날렵하고 시원하게 뻗어 오
        글 : 박일선 (단청산수화 작가)
                                                        른 추녀와 사래에 육색으로 간결하게 채색한 단청은 미니멀하게 느껴지지만,
                                                        그 옆에 같은 문양이 반복적으로 그려지고 부채살처럼 쭉쭉 뻗은 부연(附椽,
                                                        사각 서까래)과 연목(椽木, 둥근 서까래)의 단청은 녹색과 붉은 색의 색채 대
        광화문에서 남쪽으로 곧게 내려와 세종로 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다 보         비가 화려함을 더하면서 현란한 느낌을 준다. 이와 함께 처마선과 내림마루의
        면 기념비전(紀念碑殿)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크지 않은 옛 전각을 볼 수 있다.    부드럽고 장쾌한 곡선이 주는 긴장감은 현대 건축의 캔틸레버(cantilever, 외
        매일 매일이 바쁘고 복잡한 서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이 전각은 관심의        팔보)를 뛰어 넘는 아름다움을 각인시켜 주며, 조선 말기 장인들의 뛰어난 솜
        대상이 아닐뿐더러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도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씨와 궁궐 단청의 멋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얼마 전 광화문에 있는 대형서점에 책을 사러 가다가 눈에 띄길래 잠시 멈추       기념비전은 왕실의 궁내부(宮內府)에서 마지막으로 직접 공사를 시행한 건물
        고 전각 앞에 설치된 설명을 읽어 보면서 어떤 이유로 이 자리에 이런 전각을      로서 규모는 작다고 하지만 건물을 짓는데 많은 돈이 들어갔을 테고 단청을
        세우게 되었는가를 제대로 알게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단청이 조선 망국에 어       하는데도 역시 이에 못지않게 큰 돈이 들어갔을 것이다.
        떤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을까?'라는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당시 조선의 사정을 역사에서 살펴보면 국력은 쇠락하고 부정부패가 난무하
        기념비전에는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가 안치되어 있는데 조선 제26대      여 하루도 나라가 편할 날이 없었으며 다른 나라에게 나라를 빼앗길 위기가
        임금인 고종이 즉위 40주년이 된 것과 육순을 바라보는 나이인 51세가 되       목전에 다다랐음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권위와 왕실의 영화를 위하여 궁궐과
        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일, 그리고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대형 건축물을 조성하는데 열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덕수궁의 예를 들면 가
        황제의 칭호를 사용했던 것을 기념하여 1902년(광무 6년)에 세웠다고 한다.     장 중심이 되는 정전인 중화전(中和殿)의 경우 1902년 많은 돈을 들여 중층 규
        이 비석의 앞면에는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이 글씨를 썼다고 하는데 '대한제국       모로 새롭게 건립하며 화려하게 단청을 하였으나, 1904년 함녕전에서 시작된
        대황제보령망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大韓帝國大皇帝寶齡望六旬御極              큰 화재로 타버리고 나서  2년 후 1906년 지금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새로
        四十年稱慶紀念碑)라는 비명이 새겨져 있다.                         지으며 거듭해서 국고를 탕진했다. 또한 고종이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거나
                                                        외교 사절단을 맞아 연회를 여는 등의 목적으로 1900년에 정관헌(靜觀軒)을
        이 전각은 이중(二重) 기단(基壇)위에 세운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겹처   지었으며, 근대식 석조 건물로서 1900년에 착공하여 대한제국이 망한 1910
        마에 사모지붕을 한 정자(亭子)형 건물이다. 처마와 공포에는 호화롭게 단청       년에 완공된 석조전(石造殿)을 비롯해서 많은 궁궐 건축물을 지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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