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9 - 2019년10월전시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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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60.6x90.9cm Sand on canvas 2019
자면 전자는 서구적, 후자는 동양적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을 삼각형과 사각형
으로 단순화하고 직선을 교차하거나 다양한 길이나 두께를 사용해 표현한 작
품들은 도시적이며 서구적이다. 일정한 간격의 동심원을 반복하거나 직선을
임도(林道) 82.2x82.2cm Sand on paner 2019
활용하여 그려낸 다양한 기하학적 문양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직선이 주
를 이루는 시리즈는 인공적이다. 반면, 휩쓸리거나 흩어지기 쉬운 모래의 특성
을 활용해 자유로운 선과 우연성이 주를 이루는 작품들은 자연적이다. 물결이
휩쓸리며 남긴 흔적, 여기에 흐르는 구름, 스치는 바람, 수목의 가지 등이 표현
된 작품은 곡선적이며 동양적이다. 물에 대한 세세한 정보를 알 수 없다. 대신 폭력이나 강압 등에 의해 죽음의 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쌓인 퇴적층의 절단면을 드러내 보이는 것 같은 작품, 물 점으로 집단몰이 당하는 세상 동물들의 비극적 운명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결 모양의 자연스러운 무늬들이 화면을 주도하는 작품, 빗방울이 떨어져 남긴 동물의 모호한 형상들은 공존, 공생의 질서가 흔들리는 불편한 현실을 대변한
흔적이나 진동에 의해 형성된 모래 층위를 그대로 고착화한 작품 등에서 우 듯 보인다. <동물도감>의 불완전한 세상을 <약육강식>이란 작품과 연결해보
연의 효과로 얻은 형상들은 자연현상이 그려낸 오묘한 세계처럼 어딘지 신비 면 작품의 의도가 더 잘 읽힌다.
로움마저 품고 있다. 이처럼 모래의 물성을 활용한 뿌리기, 불기, 흘리기, 진동
등 작위적 개입과 바람, 중력, 물을 이용하여 우연적 효과를 극대화한 시도를 동물의 세계는 약한 동물이 강한 동물에게 먹히는 약육강식의 구조이다. 그러
통해 드러난 형상들은 사실상 그의 작품이 지닌 조형적 힘이다. 사고를 좀 더 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약육강식은 강자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먹이사슬
확장하면 그의 작품은 현실의 자연 풍경보다는 상상 속에 머물다 사라진 고대 이라는 자연의 법칙을 유지하는 질서이기도 하다. 약육강식은 자연생태계를
의 유적지를 떠올리게도 만든다. 자연(산)을 기하학적으로 표현했지만, 수직 유지하는 법칙이자 순환과 공생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원리는 인류의 역
적 상승감으로 거대한 피라미드를 마주한 느낌을 주는 그림이라든가, 황량한 사에도 고스란히 대입된다. 인류의 역사를 약육강식이 지배한 역사로 보는 시
사막의 모래바람에 가려져 희뿌옇게 보이는 풍경이거나, 모래에 묻혀 사라져 각은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구조가 철저하게 반복되어 왔다고 믿는다. 그러
버린 세계를 떠올리게 하는 형상의 작품들이 여기에 속한다. 암호 같은 기하 나 인류역사도 공존공생의 법칙을 벗어나면 붕괴하고 만다. 이는 지난 역사가
학적 문양 등도 고대 문명의 한 부분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여기에 잊을 수 없 말해준다. 결국, 동물세계이든 인간세계이든 약육강식보다는 공존공생의 원
는 소중한 대상, 혹은 기억 속에 머무는 추억을 상기시키는 작품들은 인간과 리가 작동하여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는 인식이 더 중요하다. 엄시문이 동물시
삶, 자연과 삶을 통해 생성과 소멸의 순환적 구조를 자연스럽게 돌아볼 수 있 리즈에 담고 있는 메시지이다. 땅의 이미지를 표현한 시리즈 또한 같은 맥락
게 한다. 물론, 자연의 생성과 소멸을 표현한 형상 중 작가의 기억에서만 소환 이다. 인간에 의해 변형된 땅은 생명을 잉태하고, 성장시키는 모체로서의 역할
되고 회자되는 대상도 있다. 예컨대 검은색으로 표현한 나목(裸木)들은 죽음 을 잃어간다.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흙의 본성을 다른 존재로 변질시키는 현상
의 분위기를 내뿜는다. 생생함을 뽐내던 풍성한 잎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은 동물시리즈를 통해 바라본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남은 표현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개인적 고뇌의 흔적이 보인다. 결국 엄시문
의 작품은 전설처럼 기억 속에 존재하는 풍경들이나, 주변에 흔히 존재했지만 엄시문은 수십 년 동안 일관되게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해왔다. ‘오랜 시
그 가치와 의미에 소홀했던 자연의 소소한 대상들을 자연과 공존하여 살아온 간 자연과 인간을 표현 주제로 삼았다’는 작가의 말처럼 엄시문은 자연을 이
인간의 보편적 상념과 흔적으로 확대해 제시하고 있다. 루는 요소를 인간의 삶과 관계시킨 조형 탐구를 지속하고 있다. 쉽게 마주할
수 있는 자연의 요소들을 기하학적 추상이나 극사실적 기법으로 표현하는 방
이번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 중에는 지금까지 즐겨 사용한 바람, 구름, 산, 나무, 법, 자연이 만들어낸 우연적 효과를 화면에 고스란히 담는 방법, 이상 두 가지
물, 흙 등 자연적 조형언어 대신 새롭게 등장한 동물형상이 눈에 띈다. 동물형 조형어법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성을 그려왔다. 특히 자연의 가치와 의미를
상은 여러 자연적 요소와 다르게 역동적인 구도로 표현되고 있다. <동물도감 망각하는 인간의 이기심과 무심함 때문에 자연과 인간의 공존공생의 질서가
>은 중앙을 향해 달려드는 여러 동물형상을 하나의 패턴처럼 반복한다. 동물 무너지는 것을 경고하며,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되돌아보게 하는 메시지를 다
의 형상들을 콜라주 기법을 응용하여 표현했다. 화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 양한 조형에 담아 확장하고 있다. 모래 위에 자연과 인간의 공존공생의 원리
나라 또는 개별적 지역에 사는 동물의 분포, 분류, 형태, 생태 또는 경제적 의 를 자신만의 중의적 조형어법으로 구축해가는 엄시문의 창작활동이 모래처
의 따위에 대한 모든 연구 자료를 집대성하여 써 놓은 책’을 일컫는 동물도감 럼 켜켜이 쌓여 현대인들에게 큰 울림을 전한다.
의 사전적 의미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에서는 작품 제목처럼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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