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 - 전시가이드 2025년 08월 이북
P. 25

무위심상(無爲心狀)  70x52.5cm  캔버스에 먹물  2019





            하게 정립하고 있는 역량을 갖춘 작가라 하겠다. 이 글에서는 작가의 독특        는 정도에 따라 좀 더 짙게 덧칠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먹의 농담이 자연스
            한 표현기법에 기반한 그의 먹물 산수를 무위심상(無爲心狀)의 관점에서          럽게 나타나도록 유도한다. 그러는 중에 서서히 퍼지게 하거나 약간 문질러
            다루어 보고자 한다.                                     퍼지게 하는 방법도 사용한다. 그런 가운데 여러 준법이나 필법이 부분적으
                                                            로 등장한다. 그는 붓 대신에 초기엔 나이프를 사용하고 그 뒤에 주로 롤러
            작가 전제창은 자신의 작품을 가리켜 먹물로 그린 산, 곧 먹물 산이라고 말       를 사용하여 화면을 칠하는 작업을 해왔다. 작가에 따르면, 화면 위에 먹물
            한다. 왜 먹물일까를 생각해 본다. 물론 동양화의 많은 재료 가운데 먹은 수      이 흘러서 자연스레 마르는 과정까지, 대체로 열한 번 정도의 과정을 거치
            천년에 걸쳐 오랫동안 살아남아있기에 질긴 생명력이 뚜렷하다고 하겠다.          면서 작품의 마무리에 이른다. 힘들고 고된 작업이라 여겨진다.
            단지 재료에 그치지 않고 먹이 지닌 특성이 직관과 함축이라는 동양적 정
            신문화를 담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따라서 먹의 농담을 살린 화면과 여백        자연스레 스며든 먹물 산(山)은 무의도의 의도라는 심정과 자세로 기다리
            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강약과 혼탁을 조절하면 특유한 그림맛이 나름대로          는 중에 우연적 요소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개입하여 형상을 빚어 놓은 결
            우러난다. 그는 기법에 관해 많은 고민을 하던 중에 대학에서 ‘기법연구’ 강      과물이다. 시간이란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해 가는 끝없는 흐
            의를 맡게 된 계기로 학생들 나름대로 각자에 적합한 기법을 찾아 작업하         름으로서 운동과도 관련된다. 이 운동은 대체로 선형적으로 진행되나 때로
            는 과정을 가까이 관찰하게 되었다. 학생들의 작품을 보면서 다양한 기법         는 역류와 맴돌이의 비선형적 순간도 겪는다. 그렇지만 운동은 현상계에 존
            에 대한 개별적인 방식을 인정하고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작가         재하는 모든 것의 생성과 성장, 소멸의 과정에 어김없이 등장하며 관계한
            는 끊임없이 여러 기법을 실험하며 모색하는 가운데 학생들과의 교육현장          다. 먹과 물, 그리고 시간이 기다림 속에 우연이 서로 어울려 나타난 형상인
            을 체험하고 자신의 작품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더불어 얻게 되었다고 토         것이다. 작가는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천천히 형성된 여러 형상들을 보며 ‘
            로한다. 무엇보다 작업에 있어 작가의 자유로움을 지향하는 마음이 재료          정적 속에 머물러 있다가 천천히 흐름에 이르는’ 즉, 고요함 가운데에서 움
            와 기법, 도구에 얽매이지 않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삶      직임이 갖는 깊은 의미를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비유하건대, 마그마
            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은 대비를 이        가 분출되어 위로부터 아래로 흘러내려 차츰 식어가면서 여러 지형을 생
            룬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서 가능한 한 인위적인 것을 배제하고 자연스         성하고 그에 따른 다양한 형태와 성질의 암석을 산출하는 것과 비슷한 이
            러움 그 자체에 높은 가치를 둔다. 자연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변      치임을 떠올리게 된다.
            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유기적인 것과 무기적인 것을 함께 포용하며 전
            개되는 까닭이다.                                       독특한 기법을 고안하면서 동시에 작가는 그림 틀의 크기나 재질 및 캔버
                                                            스를 필요에 따라 만들어 사용한다. 그가 사용하는 주된 캔버스는 아마포
            그는 먹의 농담을 이용하거나 먹물이 적절하게 번져 퍼지게 하는 기법을 사        이다. 아마포(린넨, linen)는 고대부터 직물 재료로 널리 사용하였으며 물감
            용하더라도 이전과는 아주 다른 방식을 취한다. 또한, 어느 정도 화면의 질       이 닿으면 탱탱하게 당겨지는 성질을 지닌다. 이러한 아마포에 분토나 돌
            감을 도드라지게 하여 입체감을 나타내는 경우에도 먹 자체에 의한, 이를         가루를 아교와 섞어 칠한다. 그 위에 먹물을 부은 다음, 마르는 과정에서 캔
            테면 번지면서 흐릿하거나 깊이감이 살아나는 방법에 의존하지 않는다. 화         버스의 뒷면에 투과되고 투영된 자연스런 형상들이 빚어낸 모습이 한 폭의
            면 위의 먹물이 지닌 특성인 번지게 하거나 퍼지게 하는 방법 외에도 마르        산수풍경이 된 것이다. 이는 이른바 세렌디피티로서 미적 즐거움의 자연스


                                                                                                       23
                                                                                                       23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