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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다_봄,여름,가을,겨울, 각 45.5×53cm, 2019                        담다, 70x70cm, 장지에 채색, 2019








            잔을 이용하여 마실거리와 여유를 넘기는 시간은 나라는 사람에 대한 온전한        야지, 저녁에는 그림을 그려야지- 그리고 흥미롭게도 매일을 다르게 하는 일
            집중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잔에 담겨 있는 것은 오히려 나의 시간이며 기억       상의 특별함은 이러한 계획 밖에 있다. 일상은 정해진 루틴과 일정으로 반복
            그리고 가능성과 같은 가치 일 수 있다. 입술에 잔이 닿는 얼핏 단순한 접촉은     되는 시간이다. 단위가 무엇이던 우리는 비슷한 나날보다는 특별한 순간을 기
            그 안의 내용을 알게 하는 실제적인 열쇠 일 것이고, 잔에 담긴 내용에 대해      억하고 싶어하지만 결국 하루하루라는 일상 안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조금씩
            알아차렸을 때 그것이 희망에의 가능성 그리고 일상의 아름다움을 오롯히 담        다른 매일매일이 뭉뚱그려져 일상이 된다. 그렇기에 일상은 예측 가능한 현재
            고 있다면 그 얼마나 더할 나위 없을까. 나는 그림을 통하여 잔 속에 담겨 있     혹은 약간의 과거를 참고하여 예상해내는 얼마간의 미래이며, 탄력 없이 고정
            는 저마다의 일상에의 가치 그리고 소중한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        적인 것 같지만 사실 다양한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다. 수동적으로 이용되는 그릇의 역할을 넘어 무언가를 담는 주체로서의 잔
            의 역할에 주목해보자. 하루하루 가치있는 일상을 품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추       「담다」는 2012 서울대학교 동양화과 졸업전시를 시작으로 다양하고 또 다채
            천한다. 자신에 잔에 아름다운 일상, 변화무쌍한 우리의 시간을 품어보라고-.      롭게 펼쳐온 작품세계이다. 다양한 부문으로 파생되고 정제되기를 반복하여
                                                            현재의 흐름으로 현재 진행중이고 또 발전 중인 세계관이다. 「담다」가 가진 스
            흔히 한 사람의 자질과 노력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대기만성'이라는 사자성어      토리는 자전적인 것에서 출발하지만 이 모든 과정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청
            를 사용하곤 한다. 하지만 이 단어가 주는 교훈 뒤에는 누구나의 걱정과 맞닿      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자아에 대한 고민과 닮아 있기 때문에 많은
            는 지점이 있다. 나의 그릇의 크기와 완성에의 시점 그리고 그 내용물에 대한      사람과 이 스토리를 나누고 싶다. 「담다」의 주된 갈래는 잔의 배열과 그 아슬
            의심과 고민이 현대인들의 걱정과 그 어찌 상통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일상 없      아슬한 배치에서 은유적으로 비롯되는 현대인의 상태를 어림짐작하게 하는
            이 일과 휴식으로 이루어진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는 많은 현대인들에게 이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작업을 위해서 연속된 드로잉을 하고, 이것은 마
            은 막연한 미래에 대한 기대를 줌과 동시에 나의 그릇 크기에 대한 걱정을 수      치 드라마 제작과정에서의 쪽대본과 닮은 부분이 있다. 하루라는 안의 계획밖
            반하는 단어일 것이다. 나의 그릇이 조금이라도 더 크고 빨리 더 많이 채워지      의 예상 불가한 지점을 나는 즉흥성으로 풀어내는데 그래서 나는 미리 딱 맞
            길 바라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갖은 고민의 교차점에 바로 나의 그림       게 완성된 스케치를 가지고 작업을 시작하지 않는다. 그림 한장을 그리기 위
            의 본질이 위치한다. 우리는 작고 소소해 보일지라도 오늘 하루하루, 잔 하나      해서 다양한 접근에서의 드로잉을 통해 최종적으로 하나의 형태를 조금씩 눈
            하나가 가진 가능성을 부정하지 말자.단조로운 일상, 매일 같은 오늘- 같은 말     에 보이게 한다. 단편적으로 스치는 내 머리속의 생각들을 연속해서 크로키로
            로 우리의 시간을 폄하하지 말자. 오히려 앞으로의 삶에 펼쳐진 다양한 선택       옮기고 이 단편적인 이미지들이 하나의 흐름을 보이기 시작할 때에 나는 작업
            지 중 하나인 오늘, 바로 그 오늘이 모여 만들어진 발자취를 나는 그림을 통해     에 들어간다. 네비게이션은 없지만 내가 원하는 바를 위한 지도는 가지고 있
            엿보게끔 한다. 오늘 하루 나의 잔에 담긴 자취를 들여다보고 그걸 통해 내가      는 셈이다. 나는 이러한 나의 작업 과정이 우리가 하루를 살아나가는 방식과
            지나온 매일을 다시 인식해보자.                               도 닮았다고 생각한다.
            흥미롭게도 하루를 일기예보 마냥 훤히 들여다보고, 100% 아니 120% 이상     「담다」는 앞으로 더 다양한 방식으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마음속의 이
            활용하고 싶어하는 현대인들의 계획성은 하루하루를 더 빠르게 흐르게 한          야기와 살아가는 나날, 그 과정에의 응원 그리고 미래에의 희망을 모두 아우
            다. -일찍 일어나야지, 오전 중에 메일 확인을 다 해야지, 오후에는 짐을 챙겨    르고 싶다. 당분간 「담다」의 이야기는 한동안 길어질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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