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2 - 종사총람 수정증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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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만  보첩의  파별(派別)이  없는  것은  문헌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

                      첩에  서문을  싣지  않으면  논할  것이  또  무엇이겠는가?  송(宋)나라에  이르러서야
                      보첩이  크게  행해져서  각기  범례(凡例)를  처음으로  정해서  격식(格式)을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먼 후손의 처음 나온 시작과 중계(中系)에서 파가 갈라진 근원을
                      그 전해온 세대를 계산하고 소목(昭穆)을 계승하여 관작(官爵) 품질(品秩)과 누구

                      에게  장가들고  시집  갔는지와  생년월일과  자손의  숫자를  모두  자세히  기록하고,
                      방손(傍孫)  지파(支派)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빠짐이  없게  되어  같은  뿌리  같은
                      근원에서  나온  의리를  돈독하게  하였기  때문에  미소(眉蘇)의  보첩을  노천(老泉)
                      이  지었고  구양씨(歐陽氏)의  족보를  육일(六一)이  서문을  써  지금까지  오래전해

                      민멸(泯滅)되지 않은 것은 보첩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척김씨(三陟金氏)는 그 전해 내려온 연원(淵源)이 멀다. 비조(鼻祖)는 대보(大輔)
                      휘(諱)  알지(閼智)요  중간에서  실직군(悉直君)  휘  위옹(渭翁)에게서  분파되었는데
                      삼척김씨라  한  것은  실직군이  삼척에  봉해져  그  봉지(封地)  이름을  딴  것이니  옛
                      날 법이 그랬다. 신라  때 시작하여  고려를 거쳐 우리 조선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이요  이미  五十世(세)가  지났는데도  착오가  없고  소목이  차례대로  벼리처럼  조리
                      가 있게 찬란하게 서로 전해 온 것은 보첩이 자세하여 잘못됨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조선  이래로  침체되어  떨치지  못한  것  역시  5백년이  되었고  또  여러  차례
                      전쟁을  겪었는데도  그  사이에  반족(班族)을  유지해  오고  그  세덕(世德)을  이어
                      대대로 벼슬이 이어진 큰 가문에 뒤지지 않은 것은 어찌 대대로 현철(賢哲)한 자

                      손이 있어 효성과 돈목(敦睦)을 모범으로 삼고 문학(文學)이 끊임없이 이어져  추
                      락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  근원이  깊은  물은  그  흐름이  깊고  그  뿌리가  깊은  나무는  그  가지가  무성하
                      게 마련인데 삼척김씨는 상하 수천 년에 가깝고 후손이 50세에 이르도록 끊임없
                      이  이어진  것은  뿌리가  깊고  근원이  멀게  가지와  물줄기에  이른  것이  아니겠는

                      가?  지난  정조(正祖)  을묘년(一七九五)에  보첩을  간행해  계속  구보(舊譜)를  간행
                      해  세대(世代)  소목(昭穆)  가취(嫁娶)  생졸(生卒)과  자손의  분파(分派)  한  가지도
                      빠짐없이  다  자세히  수록되어  전해와  효제(孝悌)의  풍습이  돈독한  것이  마땅하
                      다.  지금부터  을묘년이  또  五十五년이  되어  세대가  멀어지고  분파가  더  번거로

                      워져 가취와 생졸이 을묘보에 비해 더욱 번거롭게 되었다.

                     이에 그 후손 학도(學度)와 응로(膺魯) 시정(始鼎) 제군이 옛 규정을 밝히고 가범
                      (家範)을 이어받아 세대가 멀어지면 혹 문란해질까 걱정하고 지파가 점차 나뉘면
                      더욱  소원해질까  염려해서  재정을  모으고  힘을  내어  보첩을  중수(重修)해  수천
                      년  전해온  보첩과  일관(一貫)되어  일목요연(一目瞭然)해  착오가  없게  되었다.  더

                      욱  감탄할  일은  그  효제하고  돈목하는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  시종  쇠퇴하지  않
                      았는데  효제하고  돈목하는  풍습이  시종  쇠퇴하지  않으면서  후손이  번창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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