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4 - 종사총람 수정증보판
P. 184
갑술보 서문(甲戌譜 序文)
족보는 전하기가 어렵다. 중국처럼 큰 나라도 책이 매우 많은데도 사대부(士大夫)
들이 종종 그 본 계파(系派)를 잃어 전고(典故)하는 자들이 매양 이를 병통으로
여긴다. 문명(文明)의 다스림이 송(宋)나라보다 더한 나라가 없었으나 정부자(程夫
子)가 일찍이 백년을 전해 온 집안이 없다고 탄식하였으니 보학(譜學)이 참으로
어려운 것이라 하겠다.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삼한(三韓) 이래로 여러 차례 전쟁을
겪어 전적(典籍)이 중국보다 훨씬 적어서 이 일이 더욱 어렵다. 그래서 비록 크다
고 일컬어지는 성씨와 박학다식한 큰 학자라 하더라도 그 보첩을 먼 윗대까지 거
슬러 올라가 보면 빠진 곳이 없지 않아서 뜻있는 자들이 이를 개탄해 왔다.
내가 보건대 삼척김씨(三陟金氏)의 족보는 신라 대보공(大輔公)에서 시작하여 중
간에 실직군왕(悉直郡王)이 있으니 지금부터 수 천 년이요 50세가 되어 그 원류
(源流)가 아득히 멀다고 하겠다.
그런데도 계파와 소목(昭穆)이 정연하여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으니 사람들로서
하기 어려운 일이니 어찌 그리 훌륭한가. 쌓아온 바를 돈독히 답습(踏襲)하지 않
았다면 어찌 이렇게 될 수 있었겠는가?
하루는 김낙호(金洛鎬)군과 김원직(金源職) 어른이 지난번 보첩을 가지고 나에게
와 서문을 청하면서 말하기를“보첩을 만든 지 오래여서 장차 보첩을 인쇄하려고
합니다. 우리 김씨는 신라와 고려를 거쳐 오는 동안 대대로 드러난 분이 많아서
갑족(甲族)이라고 일컬어졌으나 근래에 떨치지 못하여 입신양명(揚名立身)해서 조상
을 영광스럽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선계(先系)라도 잘 정리하여 후손에
게 물려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서문을 쓸만한 사람이 아니라
고 사양하면서 말하기를“나의 말은 기록할 수 있고 그대의 정성은 가상하나 그대
는 마땅히 해야 할 일만 하면 되지 가세가 떨치고 떨치지 못한 것은 논할 바가 아
니다. 대저 침체되고 현달하는 것은 군자(君子)들이 명운(命運)이라고 하여 마음 쓰
지 않았다. 어두워졌다가 다시 드러나고 굽혔다가 펴지는 것 역시 이치이다.
삼척김씨는 오래 쌓아온 바를 답습해 왔으니 크게 빛나고 떨칠 것은 손가락을
굽혀 세지 않아도 불을 보는 것처럼 확실하다. 황하(黃河)처럼 큰물도 중국을 거
쳐 복류(伏流)하고 장차 들보로 쓸 큰 나무도 반드시 그 뿌리가 고생을 하게 마
련이다. 그러니 후일 나라를 다스릴 큰 인재가 김씨 문중에서 나오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우선 이처럼 써놓고 기다리겠다.”라고 하였다.
갑술년 계추(季秋)에 숭록대부(崇綠大夫)
행이조판서겸홍문관제학(行吏曹判書兼弘文館提學) 안동(安東)
김세균(金世均) 씀.
<己丑大同譜 一卷75~77>
184 三陟金氏 宗史 總覽 修訂增補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