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51 - 종사총람 수정증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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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靑山 門前流水 仁者樂也 智者知之)라고 하였다. 또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에게 명
하여 태학(太學) 문설주에다『삼척처사김빈(三陟處士金鑌)』이라 크게 써 붙이도록 했
으니 임금께서 현인(賢人)을 좋아하신 것과 공의 수양함이 어떠하였는가를 이로써 미
루어 알 수 있겠다.
이때부터 허명(虛名)이 세상에 알려진 것을 부끄러워하여 더욱 주정지경(主靜持敬)
에 힘쓰고 벼슬로도 그 뜻을 빼앗지 못하고 밖의 일로도 그 마음을 흔들지 못하고 오
직 정양(靜養)에 힘써서 학문이 진보만 하고 퇴보함이 없었다. 일찍이 먼 고장에서 시
문(詩文)으로 늙어가는 자들이 예법에는 어두워서 일을 당하면 문란한 것을 걱정하여
무술년에 강공(姜公)에게 아뢰어 최진후, 최동흘(崔東屹)공과 함께 가례(家禮) 두 국
(局)을 간행해 향리에 반포하여 후학(後學)으로 하여금 예의를 알게 하였다. 계해년 가
을에는 또 손수 사례통고(四禮通考)를 베껴 책머리에다 서문(序文)을 써서 후손에게
유훈(遺訓)하고 더욱 향교(鄉校) 일에 뜻을 두어 문묘(文廟)를 새로 증축하고 힘껏 교
도하여 유학(儒學) 진흥시키는 것을 자기 임무로 삼으니 고을 풍속이 순후(淳厚)해졌
다. 일찍이 사는 집에다『위빈돈옹(渭濱遯翁)』이라는 현판을 달았으니 이는 대개 강
태공(姜太公)이 위수(渭水)에서 낚시질하던 뜻을 취한 것이며 또 공이 사는 곳이 마침
동해 부근이기 때문이었다. 날마다 그 사이에서 시를 읊고 낚시질을 하는 모습이 시원
하고 상쾌하여 세상에서 우뚝 혼자 서는 뜻이 있었다.
제5편 선조 행장·갈명기(先祖 行狀·碣銘記) 3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