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55 - 종사총람 수정증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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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처사공(梧亭處士公) 행장(行狀)
공의 휘는 흥일(興一)이요 자(字)는 인칙(仁則)이며 오정(梧亭)은 그 호(號)이다. 우
리 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여덟 째 아들 삼척군(三陟君) 휘 추(錘)의 아들 휘 위옹(渭
翁)에게서 계출하였는데 삼한 벽상공신으로 실직군왕(悉直郡王)에 봉해졌으니 실직은
바로 지금의 삼척부인데 자손들이 본관을 삼은 것이다.
여러 대를 전해 휘 양보(良輔)는 선조(宣祖) 임진왜란을 당해서 임금을 호종(扈從)하
면서 충성을 다해 나라를 안정시켜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忠勤貞亮竭誠效節協
策扈聖功臣) 자헌대부한성부판윤(資憲大夫漢城府判尹) 척주군(陟州君)에 봉해졌으니 공의
十대조이다. 휘 귀활(貴活)은 문학(文學)을 잘했으나 덕을 감추고 벼슬하지 않았으며 휘
태형(泰亨)은 사림(士林)들과 함께 용산서당(龍山書堂)을 창건하여 학문을 진작시키고 휘
계광(啓光)은 통훈대부요 휘 응서(應瑞)는 통정대부이니 이들이 공의 고조와 증조할아버
지 아버지이며 어머니 숙부인(淑夫人) 강릉김씨(江陵金氏)는 수영(壽瀛)의 딸로 정숙하여
부덕(婦德)이 있었는데 정조(正祖) 무술년 十二월 十四일에 공을 출생하였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골상(骨相)이 비범하여 어른다운 풍도가 있었으며 자라서는 가
정교훈을 받아 번거롭게 채근하지 않아도 문예(文藝)가 성취되고 행실이 닦여서 사림(士
林)의 종장(宗匠)이 되어 고을에 명성이 자자했다.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여 일
상생활에서 하는 바가 모두 배운 것을 실천하고 거기다가 자세히 살피고 조심하였으며
양친을 효성으로 모시어 가까이에서 조금도 게을리 함이 없었다. 경신년에 아버지상을
당하여 슬퍼함이 예법보다 지나치고 초상을 한결같이 가례(家禮)대로 치렀으며 초하루와
보름이면 성묘를 하였는데 비바람이 불고 눈이 내려도 그만두는 일이 없었다.
자질(子姪)을 효제(孝悌)로 가르치고 종족과 화목하게 지냈으며 이웃을 두루 보살펴
주고 빈객(賓客)을 믿음으로 대접했으며 하인들에게까지 매를 때리지 않고도 은혜와
위엄을 보이니 세상이 모두 복종하였다. 무인년에 어머니상을 당하여 한결같이 아버지
상처럼 엄격하게 하였다. 무술년에 공이 본군(本郡)에 살면서 문묘(文廟)의 전무(殿廡)
와 담장이 무너지자 부사 이규헌(李奎憲)에게 청하여 보수할 계책을 세우고 교임(校任)
인 최익정(崔翼禎) 홍병권(洪秉權) 등과 의논해 재정을 마련해 공사를 시작해 준공했
다. 시조(始祖) 실직군왕의 묘역을 세대가 오래되어 실전해 제사를 지내지 못한 것이
후손들의 한이었는데 사가(史家)와 고로(古老)의 말에 갈야산(葛夜山)과 사직산(史直山)
에 실직군왕 양위분의 묘소 비슷한 게 있다는 말을 듣고 산을 파헤쳐 지석(誌石)을 찾
고자 하였으나 이 산이 삼척부의 진산(鎭山)이어서 경솔히 착수할 수가 없었다. 그해
가을에 족형 학조(學祚)와 의논 하여 이부사(李府使)의 허락을 받아서 좋은 날을 가려
제사를 지내고 사직산에서 지석을 찾으니 단지 기왓장 몇 조각만 나오고 안에는 모두
돌로 쌓여 있었으며 갈야산 역시 상고할 만한 지석이 나오지 않아서 기다고 하지도
못하고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이에 전대로 다시 고쳐 봉(封)하여 위안제를 지내
제5편 선조 행장·갈명기(先祖 行狀·碣銘記) 3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