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53 - 종사총람 수정증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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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이런 효행이 후세에 무궁하게 전해지면 마치
살아있는 듯 하여 해와 달처럼 빛이 나고 산봉우리처럼 우뚝할 것이다. 전문(全文)은
너무 번거로워서 다 기록할 수 없기 때문에 수말(首末)은 생략하였다.
삼척도호부사(三陟都護府使) 박행의(朴行羲) 지음.
판관공 행장(判官公 行狀)
휘(諱) 성경(成慶)이신 공(公)께서는 고려와 조선 왕조 교체기에 고려의 신하로서 벼
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가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이 폐위되어 삼척으로 유폐되자 즉
시 삼척으로 이사하여 외로운 폐주 옆에서 입시한 충신 휘 인궤(仁軌)의 현손이시다.
임진왜란의 여파로 가승(家乘)이 정하여지지 않아 공(公)의 생몰연대와 행적을 다 헤
아릴 수 없어 안타깝기 그지없으나 다행스럽게도 조선왕조실록에 삼십(三十)차례 등재
된 기록과 여지지(輿地誌) 등에 근거한 유허비명을 상고해보니 공께서는 새로이 개창한
조선왕조가 안정기에 접어든 세종조 말년 전후에 태어나신 듯하다. 세종 九年인 一四
二七年에 태어나서 편찬과 번역에 발자취를 남기신 천은당 노사신(盧思愼)을 스승이자
좌주로 모시고 문생으로 수학하여 성종 三年인 一四七二年에 문과에 급제하셨다. 첫
벼슬은 종六품직인 예조 동혜원 인의직을 제수 받아 나라의 조회나 제사 의례를 맡아
보셨다. 그 후에 종五품직인 안동대도호부판관으로 부임하시어 안동대도호부사와 전영
장을 겸하여 맡으셨고, 중친부 부령이 되셨다. 성종 十一年인 一四八〇年에 조산대부
사간원 헌납에 서용되어 실록에 등재된 것이 二회에 이를 만큼 간관으로서의 직간을
하여 소임을 다하셨다. 성종 二十年인 一四八九年 평창군수로서 향위 시험 입문관으로
서 그 직에 임하셨다. 훗날 여러 번 벼슬을 내렸으나 출사하지 않고 안동대도호부를
감싸고 흐르는 낙동강과 산수경승이 좋다 하여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 대실에 터를 닦
아 세거지(世居地)로 삼으며 뿌리 내리셔서 안동삼척김문 가운데 웃어른이 되셨다.
서사(書史)를 벗하며 자제교육에 힘써 문무에 걸친 인재양성뿐만 아니라 당시 유가 최
고의 덕목이던 효행을 배워 실천한 손자 휘 한백(漢伯)이 효자 정려를 사액 받고, 이손(耳
孫) 휘 익찬(益燦)이 효행록에 등재되어 효제(孝悌)지의하는 세덕가풍이 널리 모범이 되니
이러한 公과 後孫들의 유덕을 기리고자 공의 지세 三百年이나 지났건만 공께서 살던 그곳
에 유허비를 세웠다. 공의 인품과 덕망은 안동대도호부 인근에 세거하던 여러 가문을 대
표하는 쉰 세분 선비들이 유허비 건립 때 모여서 운(韻)을 바꾸어 가며 지은 헌시집(獻詩
集) 한 권에 잘 드러나 있으며 유허비와 함께 이 시집(詩集)은 현존하고 있다.
二千八年十月
판관공(判官公) 二十世孫 동원(東元) 삼가 지음.
제5편 선조 행장·갈명기(先祖 行狀·碣銘記) 3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