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66 - 종사총람 수정증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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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昭聖王) 애장왕(哀莊王) 헌덕왕(憲德王) 흥덕왕(興德王) 희강왕(僖康王) 민애왕(閔哀
王) 신무왕(神武王) 문성왕(文聖王) 헌안왕(憲安王) 경문왕(景文王) 헌강왕(憲康王) 정
강왕(定康王) 진성왕(眞聖王) 효공왕(孝恭王)을 거쳐 경순왕(敬順王)에 이르러 나라를
고려에 양여(讓與)하니 왕자가 불가하다고 아뢰었다. 왕이 말하기를‘내가 고립되어
형세가 약해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무고한 백성들로 하여금 피를 흘려 길바닥에 칠
하게 하는 일을 나는 차마 하지 못하겠다.’하고는 이에 시랑(侍郎) 김봉휴(金封休)를
보내 고려 태조에게 글을 올려 신하라 일컬으니 나라가 드디어 망하였다. 김씨가 三十
八세에 모두 六二六년간 왕 노릇을 하여 박씨와 석씨를 계승한 이래 가장 오래 다스
렸고 그 예악(禮樂) 문물이 이로부터 차츰 일어나게 되었다.
신라가 처음 당나라와 교통할 때 중국에는 사관(史官)의 법이 있은 지 오래였는데
우리 동방은 외지고 누추하여 문장(文章)이 없어서 이런 역사들이 전하지 못한 것이
많았다. 그러다 고려 때 김부식(金富軾)이 신라의 역사서를 지으니 그 역사가 대략 갖
추어졌으나 우리나라 학자들이 우리 역사를 전혀 공부하지 않았고 또 그 판본(板本)이
오래되어 마멸되어 세상에 전해진 것이 드물게 되어 군자들이 매우 걱정하였다. 그러
다가 공철(公轍)이 영남을 안찰(按察)하면서 참봉(參奉) 김성걸(金成杰)이 경주로부터
와서 계림의 사적을 기록하는 글을 청하니 근본을 추구하려는 뜻이 훌륭하고 먼 앞날
을 생각한 것이었다. 그 땅은 전해오지만 땅보다 더 큰 것이 있으니 어찌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자(孔子)는 주(周)나라에서 태어났는데도 말씀하기를「나는 은(殷)나라 사람이니
미자(微子)의 후손이다.」하고 또 말씀하기를「하(夏)나라의 예(禮)는 내가 말할 수 있
지만 기(杞)나라의 예는 징험하기가 부족하다. 은나라의 예는 내가 말할 수 있으나 송
(宋)나라의 예는 징험이 부족하니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지금 사방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자들이 천백 집안은 되는데 모두 신라를 선조로 하
고 있으니 공자가 은나라의 후손이라고 말한 것과 다름이 없으니 어찌 하나라와 은나
라의 예는 말할 수 있으나 기나라 송나라의 문헌은 징험하기에 부족하다고 말하겠는
가? 후일 이 비문을 잘 읽어보는 자가 있다면 거의 사서에 빠진 부분을 보충할 수 있
을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저 계림 땅은
왕업이 일어난 곳이네
그 누가 감히 공경하지 않으랴
내가 비명(碑銘)을 짓네
신라의 도읍이었으니
그 곳을 동경(東京)이라 하였네
봉황새는 자옥(紫玉)에 깃들고
문수(汶水)는 맑게 흐르네
구림(球琳) 낭간(琅玕)에
방어(紡魚) 잉어(鯉魚) 뛰노네
366 三陟金氏 宗史 總覽 修訂增補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