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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자광록대부공(金紫光祿大夫公) 단비문(壇碑文)
二十八대 조고부군(祖考府君)의 휘는 인궤(仁軌)요 성은 김씨요 관향은 삼척이시다.
상조(上祖) 휘 위옹(渭翁)은 고려 때 벼슬하여 지위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은
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검교사농경 겸어사대부좌승상(檢校司農卿兼御史大夫左丞相)
에 이르러 실직군왕(悉直郡王)에 봉해지셨으니 그 十세손이며 김씨가 삼척을 본관으로
삼은 것이 이때부터였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호군(護軍)으로 호가(扈駕)하여 경상도 가야현(加也縣)에
이르러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여 공을 세워 가야현에 올라 춘양현(春陽縣)을 하사받
았다.(일이 고려사(高麗史) 및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실려 있다.) 이후 임금의
융숭한 대우를 받아 왕실을 위해 충성을 극진히 바쳤는데 공양왕(恭讓王) 때에 이르러
지위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러 나이가 많고 소약하여 퇴직하기를 빌어 항리로
돌아와 정양(靜養)하였다. 고려의 운명이 다하여 조선 이태조(李太祖)가 왕을 폐해 공
양군(恭讓君)을 삼아 원주(原州)로 내쳤다가 옛 신하들이 왕래하는 것을 미워해 다시
간성(杆城)으로 보내고 또 다시 삼척부(三陟府) 남쪽 궁촌리(宮村里)로 방축(放逐)하여
가시 울타리를 치고 유폐(幽閉)시켰다.
부군(府君)이 이런 소식을 듣고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내가 비록 늙었
으나 여러 대 동안 국가의 녹을 받은 신하로 군부(君父)의 위급함을 좌시(坐視)할 수
만은 없다’하고는 마침내 삼척 배소(配所) 가까운 곳으로(이 일은 강입재(姜立齋) 공
의 문집(文集)에 나온다.) 옮겨 지척에서 그 참혹한 상황을 보고는 의분심을 금하지
못했다. 그러나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꾹 참고 조용히 기
회를 기다렸다. 그러자 이태조가 회유(懷柔)하기 위한 계책으로 재삼 사람을 보내 공
손한 말로 예우하면서 여러 차례 삼공(三公)의 지위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이 일
은 우리 족보에 실려 있다.) 몰래 태자(太子) 왕석(王奭)의 아들을 울진군(蔚珍郡)으로
보내 고려 전장군(前將軍) 장천영(張天永), 임제봉(林悌鳳), 각사인(閣舍人) 최복하(崔
卜河), 태학생(太學生) 전생(田生) 등과 함께 동지 수천 명을 규합하여 나라를 회복하
려다가 미연에 발각되었다. 이태조가 군사를 내어 토벌하여 옥석(玉石)을 가리지 않고
마구 죽여 잔학하기 짝이 없어 수만 명을 살상(殺傷)하여 흐르는 피에 절구공이가 뜰
정도였다. 군(郡)을 강등시켜 현(縣)으로 만들고 또 금부도사(禁府都事) 함부림(咸傅霖)
을 삼척 배소로 보내(이 일은 울진군지(蔚珍郡誌) 및 남씨족보(南氏族譜)에 보인다.)
왕과 비빈(妃嬪), 왕자(王子)를 시해(弑害)하니 부군이 동시에 해를 당하고 나졸을 시
켜 동조자 수백 명을 잡아다 사라치(沙羅峙)에서 죽였기 때문에 후세 사람이 사라치를
살해치(殺害時)라 부르니 당시의 참상은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겠다. 아, 포은선
생(圃隱先生)은 나라를 위해 선죽교(善竹橋)에서 절의를 세우고 부군은 임금을 위해
궁촌리에서 살신성인(殺身成仁)하시었다. 비록 선후는 다르나 일은 하나이니 그 충렬
(忠烈)과 위적(偉績)을 사가(史家)들이 마땅히 대서특필(大書特筆)해야 하는데 당시의
434 三陟金氏 宗史 總覽 修訂增補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