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35 - 종사총람 수정증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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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이 조용하여 적적하니 이는 실로 천고의 한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평생 닦은
바는 단지 나라가 있는 줄만 알고 자신이 있는 줄은 모르고 죽는 것을 마치 집에 돌
아가는 것처럼 편안히 여기어 능히 만고에 도의(道義)를 세우고 천추에 강륜(綱倫)을
부식했다. 그래서 위로는 해와 별처럼 빛나고 아래로는 산악처럼 우뚝하여 천하 후세
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니 어찌 현회(顯晦)를 따지겠는가?
부군이 해를 당한 후 자손이 집안 머슴을 시켜 밤에 시신을 수습하여 고돌치(古突峙)
에 가매장 시키게 하고, 그 후 사방으로 흩어져 十세에 이르도록 성명을 숨기고 저자
에 나가지 못하였다. 그러다 영조(英祖) 때에 이르러 부군의 九세 방손(傍孫) 상구(尚
矩)가 홍서대(紅犀帶)를 받들고 대궐에 나아가 임금을 탑전(榻前)에서 배알하여 안기도
찰방(安奇道察訪)을 배수(拜受)했다.(이 일은 우리 집안 족보에 보인다.) 이후로 부군의
十一세손 휘 귀존(貴存), 귀근(貴根) 형제가 시험 삼아 교곡(橋谷)으로 나가 개척(開拓)
했다고 하니(이 일은 삼척군지(三陟郡誌)에 보인다.) 박해를 받을까 두려워서 주저한
것이다. 지난 일을 찾아 기록하자니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울음이 터져 나오고 사모하
는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거의 六백년 동안이나 아직도 비석 하나를 세우지 못
했으니 후손들의 불효한 죄를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를 두려워하여 사종제
(四從弟) 경집(景執)과 함께 약간의 재정을 마련해 건립하기를 도모하기로 했다. 일이
큰지라 멀리 서울로 가서 종족들을 찾아다니며 모금을 하니 국회의원 효영(孝榮)과 육
군소장 수중(洙重), 회사원 정언(定彥)씨가 흔쾌히 수락하여 거금을 희사해 일이 마침
내 속히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위로는 부군의 충혼(忠魂)을 위로하고 아래로 후생
들이 선조를 사모하는 뜻을 보이게 되어 그 기쁨을 이루 말로 다할 수 없게 되어 이에
감히『고려사(高麗史)』를 발췌하고『강원도지(江原道誌)』및『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
實錄)』및『울진군지(蔚珍郡誌)』『삼척군지(三陟郡誌)』를 참고하여 이상과 같이 기록
한다.
一九七八년 무오(戊午) 늦봄에 주손(胄孫) 수선(洙善) 삼가 씀.
제5편 선조 행장·갈명기(先祖 行狀·碣銘記) 4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