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64 - 한국 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_ 101가지 성경 이야기 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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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 강제로 청해서 무언가를 얻어 내겠다는 발상이 한
본문만으로도 족한데, 두 개째의 글을 쓰고 있으니 저 자신이 처량해집니다.
어쨌거나 한국 교회에 “강청하는 기도”라는 것이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이 개념을 단 두 편의 글을 통해 불식시킬 수는 없겠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져 이런 종류의 생각을 ‘상상도’하지 못하는 때가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앞의 글(64번)을 읽고 이 글을 보시는 분이면 이 비유도 앞의 글과 같은 방식
적용이 가능함을 눈치채셨을 것입니다. 일단은 “강청하는 기도”의 견해는 교리적인
부분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성경 전반적으로 옳지 않다고 말하는 점이 본문에서
발견되면 일단 의심해야 합니다. 생각하는 바가 틀렸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교리나 신앙 고백은 성경 해석을 잘못하거나 그릇된 방향으로 이탈하는 것을 막아
주는 좋은 울타리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 무언가를 끈질기게 떼쓰듯이
구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생각은 비성경적임을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
앞의 글과 같은 방식의 내용이 본문의 마지막에도 등장합니다. 결론부인 13절의
말씀을 보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 역시 우리가 기도하는 모든 삶의 영역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범주의
제한이 있습니다. 이 비유는 “성령을 받는 것”에 관한 것이지, 모든 기도 상황에
관한 비유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성령을 받은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여기서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이 사실들만을 보더라도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청하면 하나님이 주시겠다
약속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강청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궁금증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본 비유의 내용은 한밤중에 이웃을 찾아온 사람에게서 시작합니다. 주님은
이야기를 듣는 청중을 밤중에 잠자고 있는 사람으로 비유합니다. 한 친구가 밤에
찾아왔다고 이야기합니다. 친구가 말합니다.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눅 11:5)
떡을 꾸러 온 친구는 자신의 집에 손님이 왔다고 합니다. 그는 손님을 대접할
떡이 없으므로 꾸러 온 것입니다(눅 11:6). 그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