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68 - 한국 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_ 101가지 성경 이야기 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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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의 이 “강청하다”는 해석은 문제가 있습니다. 영어 성경은 이
‘아나데이아’를 여러 가지로 번역했습니다.
NIV는 “대담함”으로 번역했습니다. RSV는 “끈덕진 졸라댐”으로 번역했습니다.
NEB는 “부끄러움”으로 번역했습니다. Good News Bible도 “부끄러움”으로 번역합니다.
예루살렘 바이블은 “끈덕짐”으로 번역했습니다.
영어 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졸라대는 것”이나, “부끄러워하는 것” 둘 중 하나로
번역합니다. 한글 성경은 이 중에 “졸라대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래서
“강청함을 인하여”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씀드린 근거들을 가지고 보면
오히려 이 단어는 “부끄러움”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옳습니다. 곧 아무리 밤이
늦었다고 하더라도 친구가 손님으로 인해 떡을 꾸러 온다면, “벗 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부끄러움을 당할까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눅 11:8)고 번역이 되어야 옳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손님에 대한 성경의
정황들과 예수님이 물으셨던 질문에 대한 제자들의 대답을 고려한 해석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뒤에 나오는 “구하라 주실 것이요”(9절)나,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11~12절)라고 말씀하신 내용들도 역시 “하나님께 떼를
쓰고 구하면 들어주신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당연히’ 자녀들에게 그 필요를 따라 주신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즉 이것은 떼를 쓰는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비유의
마지막 역시 “아버지께서 당연히 주심”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따라서 우리는 이 강청함의 기도에 관한 두 번째 본문에서도 이것이 “근거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떼를 쓰면서 끈덕지게 졸라대며
기도하면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 따위를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이 본문들은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배려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은 아버지께 행패를 부리는 건달과 같은 아들이 되는 것을 가르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