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71 - 한국 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_ 101가지 성경 이야기 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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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겠느냐.”(눅 10:36)라고 물으셨을 때, “사마리아인입니다.”라고 대답하지 않고,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37절)라고 대답했겠습니까. 그들로서는 이 비유가 몹시
받아들이기 힘든 비유였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받아들이기 쉬웠건 어려웠건 간에 중요한 문제는 주님이 이 비유를 통해
그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한 바가 무엇이냐는 점입니다. 일단 이 비유를 살핌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많이 논의되어 온 “알레고리적 방법”은 논외로 하고 여기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점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알레고리에서는 강도 만난 자를 우리,
사마리아인을 예수님, 여관 주인을 사도 바울, 맡긴 두 데나리온은 구약과 신약 등으로
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이 천년 교회 전통에서 항상 있어 왔던 방법론입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에서는 이런 종류의 해석은 별로 없으므로 넘어가도록 합니다. 알레고리가 무엇인지
궁금하신 분은 비유와 관련된 다수의 책에 나와 있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3)
먼저 이 비유에는 눈여겨보아야 할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대답 방식입니다. 분명히 이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질문에 합당한 방식으로 대답하려면 주님께서는 “네 이웃은 누구누구이다.”고
답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다음과 같이 답하십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굽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누가 강도
3) 로버트 H. 스타인은 『비유해석학』, 오광만 역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p. 69
이하에서 교부들로부터 종교개혁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 비유가 어떻게 알레고리화
되었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고대교회의 클레멘트는 “선한
사마리아인=그리스도, 강도들=어두움의 통치자들,
상처=공포/육욕/분노/고통/사기/쾌락, 포도주=다윗의 포도나무의 피, 기름=성부의
사랑, 상처를 싸맴=믿음/소망/사랑”이라는 식으로 해석을 했고, 오리겐은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아담, 떠나온 예루살렘=낙원, 여리고=이 세상, 강도들=악한 세력들,
상처=불순종 혹은 죄, 제사장=율법, 선한 사마리아인=그리스도, 짐승=그리스도의 몸,
여관=교회, 데나리온 두 개=성부와 성자에 대한 지식, 여관 주인=천사들, 선한
사마리아인이 다시 온다는 것=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해하였다. 이는 어거스틴도
비슷했고, 루터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