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73 - 한국 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_ 101가지 성경 이야기 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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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는 질문입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냐뇨? 지금 율법사가
궁금한 것은 어느 정도의 레벨이 되는 사람이 내 이웃이 될 것이냐에 관한 것이지
그들의 이웃이 되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정작 율법사가 궁금해
하는 질문에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이웃이 되겠느냐?”고 제시하십니다.
덧붙여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
율법사의 질문은 “내 이웃이 어느 정도 되는 사람들부터입니까?”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대답은 “네가 가서 이웃이 되어라!”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에 대한
현명한 대답입니까? 주님은 율법의 정신이란 이웃의 지위나 수준에 잣대를 긋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주님의 대답은 질문을 단순히 회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이웃은 어느 정도 레벨이 되어야 할까?”를 질문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함께 설명하시기 위한 고도의 대답 방식입니다. 주님은 이런 식의 대답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내 이웃이 누구인가를 찾기 전에 네가 먼저 가서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한다.”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율법의 본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계명을 주셨을 때 “그렇다면 내 이웃은 적어도
30평 아파트 정도는 가지고 있고 중산층 정도 되는 교양 수준을 가진 사람을
전제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네가 가서 먼저 모든 사람들에게, 심지어
강도 만난 사람에게까지 이웃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기득권층이었던 제사장과 레위인, 날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의식의 주동자였던
그들은 이 율법의 본의를 버렸습니다. 오히려 천하게 취급받았던 사마리아 사람만이
이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행동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비유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점은 비유의 서론과 결론 그리고 비유의
전개 방식을 잘 살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주님의 의도를 읽어야 합니다.
사마리아인 비유를 살펴보았을 때, 주님이 율법사의 질문과 전혀 다른 대답을 하고
계신다는 것조차 눈치를 채지 못한 독자라면 성의 있게 읽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이 주신 방식을 따라 자연스럽게 읽는 것, 마치 주님이 지금
여기에 앉아 우리에게말씀하고 계시듯이 성경을 대하는 것, 그것이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지름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