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67 - 한국 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_ 101가지 성경 이야기 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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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하며(딛 1:8).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신 명령이었으며, 따라서 손님이 왔을 때 그를 제대로 맞지 않는 것은 큰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실례로 사사 시대에는 손님을 맞지 않은 모습을 봅니다. 삿
19:10 이하). 이런 이유로 인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밤이 늦었고 잠자리에
들었다고 해서 너의 친구가 손님이 와 떡을 꾸려 할 때 너는 주지 않겠느냐?”라고
질문하셨을 때 “당연히 그럴 수 없습니다!”라는 대답을 기대하신 것입니다(케네스
베일리는 이것을 율법에 기초하여 이해하기보다는 이스라엘의 문화적 전통에 기초해서
이해합니다. 그는 이것을 동양의 “수치문화”에 근거해서 이해합니다. 즉 그들에게 있어 한
집에 온 손님은 그들의 마을 전체에 온 손님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그를 대접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답은 제가 여기서 내리는 결론과 동일하지만,
접근법에 있어 성경에 근거하기보다 풍속에 근거하여 성경을 해석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이해한 후 말씀을 보면 여기서 “강청함을 인하여”라는
단어는 몹시 생소하게 느껴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밤에 손님이 찾아왔다고 해서
떡을 얻기 위해 이웃에게 ‘강청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비유를 이해할 때 성경이 기록하지 않은 장면을 상상력으로
더합니다. 즉 떡을 얻으러 온 사람이 밤중에 문을 두들기면서 귀찮게 하는 장면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분명 본문 말씀 자체만으로 보면 떡을 꾸러 온 사람은 아무런
떼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담담하게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눅 11:5)고만 합니다. 우리가 여기에 상상력을 더하는
이유는 “강청함을 인하여”라는 문구 때문입니다. 오늘날 “강청함으로 구하는 기도”의
근거가 됩니다.
하지만 이 “강청함”이라는 단어(헬라어로는 아나데이아)는 사실 해석이 어려운
단어입니다. 쉽게 “강청하다”라고 속단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이
그렇게 번역했기 때문에 이를 밤에 떼를 쓰는 사람의 이야기로 읽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율법에 근거하여(혹은 이스라엘 풍습에 근거하더라도)
볼 때, 떡을 꾸러 온 사람은 떼를 쓸 이유가 없습니다. 밤에 친구의 집 문을
두들기면서 “제발 나 떡 좀 꾸어 달라.”라고 소리칠 이유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밤중이건 아니건 손님이 왔을 때 떡이 필요하면 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고 이것을
귀찮아하겠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은 당연히 “그럴리가요!”라고 반응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