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79 - 한국 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_ 101가지 성경 이야기 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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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그리스도의 고통이 비슷한 맥락에 있다면 그리스도의 고난은 얼마나 하찮은
것이겠습니까?
하지만 금식을 “자신의 필요를 부인하는” 경건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유익합니다. 구약의 많은 경건한 사람들이 금식했습니다. 주님도 금식을 부정하시지
않으셨고, 사도행전에도 보면 직분자를 세우는 문제 앞에 교회가 금식했습니다(행
1)
13:2~3). 칼빈도 기독교강요 4권 12장에서 금식을 (1) 육이 방종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약화시키며 굴복시키기 위해, (2) 기도와 거룩한 명상을 위해, (3) 우리의
죄를 고백하려 할 때 우리 자신을 낮추는 증거를 보이기 위해 유익하다고
2)
하였습니다. 금식을 좋은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하지만 금식을 잘못 사용했을 때 큰 문제가 생깁니다. 가장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는 ‘금식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원래 ‘자기 의’라는 죄악된 성향을
드러내는 데 탁월한 자질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금식이 되었건 기도가
되었건, 그것을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만드는 데 매우 뛰어난 역량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신자는 이 죄악된 성향을 더욱 경계하고 더
조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금식이 문제가 되는 다른 하나는 대부분의 금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이라는
옷을 입고 우리에게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질문할 것은
“그리스도가 마태복음 4장에서 행하신 금식을 우리의 모범으로 만들 수
있는가?”입니다. 분명하게 이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예수님의 본을 좇아” 40일 금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의 금식을 우리가 본으로 삼아 따라 행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우리의 모범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행하고 계신 이 일련의 사건들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보편적으로 따라 행할 수 있는 일이
1) 마태복음 17장 21절을 보면 한글 성경에는 (없음)이라고 되어 있으나 각주에
“어떤 사본에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가
있음”이라고 되어 있다.
2) 존 칼빈, 『기독교 강요』, 김종흡 외 공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9), IV, xii,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