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3 - 오산문화총서 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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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서해안에서 조그마한 배를 타고 부산으로 오기도 하였다. 특히 B중대에
서 최후로 철수했던 제2소대 버나드 소위와 12명의 병사들은 전투 이틀 후인 7월 7일에 천안에
도착하였는데, 이들은 철수중 북한군의 도로봉쇄 지점을 다섯 번이나 돌파하고 복귀하였다. 제
52포병대대에서는 보병과 함께 있었던 전방관측반 및 연락반 요원과 포진지 주변에 배치했던
기관총 및 2.36인치 로켓 요원 등 장교 5명과 사병 26명이 돌아오지 않았다. 최종 확인된 전사
13)
자, 실종자, 포로는 사병 148명, 장교 5명이었다 .
이후 고증작업을 거쳐 확인된 내용은 공식인원 540명 중 56명(실종 8명 포함) 전사, 89명
14)
(1953년 송환 50명, 포로 중 사망 39명) 포로 이송이다 . 북한군은 전사 42명, 부상 85명의 피
해가 난 것으로 알려졌다.
전투 시간은 6시간 15분이었으나 유엔군
의 참전을 예상하지 못했던 북한은 재정비
기를 가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북한군의 남
진을 10여 일간 늦출 수 있었다. 따라서 최
후의 보루였던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후 유엔군과 국
군은 낙동강 전투를 통해 방어선을 지켜내
고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을 하게 된다. 북
한군은 미군이 참전하지 않거나 적어도 개
입하기 전에 전쟁을 끝낸다는 계획 하에 남
침을 감행하였는데, 남침개시 10여일 만에
미 지상군의 참전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또한 유엔군의 파병은 유엔 창설이후 처음
으로 유엔의 기본정신에 입각하여 유엔기
를 앞세우고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집단적 행동을 펼친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그림 8>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보낸 서신 복사본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있다.
13) Roy E. Appleman, 앞의 책, p.75. 國防軍史硏究所, 앞의 책, p.46-47.
14) 이 숫자는 죽미령 전투 참전자 노만 포스네스(Norman Fosness)의 딸 리사 숄(Lisa G. Sholl)이 부친과 함께 약 40년 동안
수집한 참전용사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제공한 인원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보병 150여명 및 포병 31여명 사상은 전사자, 포
로, 부상자를 포함한 인원으로 추정된다.
오산 죽미령 전투와 전후(戰後)의 스미스 부대 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