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5 - 오산문화총서 3집
P. 175
은벌레가 남자와 여자로 변해 다섯 쌍의 부부가 생겨났고 그로부터 세상사람들이 생겼다. 인간
세상이 태평할 때 석가가 나타나 미륵에게 인간세상을 내놓으라 했다. 미륵과 석가는 인간세상
을 차지하기 위한 내기를 하게 됐다. 미륵의 금병에 매단 금줄이 끊어지면 석가가 이기고, 석가
의 은병에 매단 은줄이 끊어지면 미륵이 이겨 세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석가의 줄이 끊
어지고 미륵이 이기자 석가는 다시 여름에 강을 얼리는 내기를 하자고 한다. 여기서도 미륵이
계속 승리하자 석가는 잠을 자면서 무릎에 꽃을 피우는 내기를 제안하고, 미륵이 잠든 사이에
미륵이 피운 꽃을 가져다 자기 무릎에 꽂아 승리한다. 미륵은 석가에게 인간세상을 내어주고 사
라진다. 석가의 승리로 말미암아 인간 세상에는 부정한 것들이 생겨나게 됐다.”
위 내용을 보면 ‘창세가’에선 하늘과 땅이 분리되기 전에 창조주(미륵)가 존재해 하늘과 땅을
나눈 뒤 땅의 네 귀에 구리기둥을 세워 세상을 만든다. 천지개벽이 창조주의 손에 의해 이루어
지는 것이다. 즉 ‘창세가’는 창조론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또한 구리기둥 넷을 가지고 땅의 네
귀퉁이마다 받쳐 세워 놓으니 하늘과 땅이 완전하게 분리되었다고 한 것은 땅이 네모난 평면구
조를 갖고 있다는 인식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이어 두 개씩인 해와 달을 하나씩 떼어내어 북
두칠성 등 큰 별과 작은 별을 만든다. 여기서도 일월조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특히 ‘창세가’의
일월조정이 다른 창세신화와 차이가 있는 것은 해와 달을 제거하지 않고 떼어낸 달 하나로 칠성
별을 만들고 해 하나로 임금과 대신, 백성의 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오산의 ‘시루말’에선 철궁
으로 쏘아 떨어트린 해와 달 하나를 제석궁이나 명도궁에 걸어놓는 것과 대비된다. 또한 미륵이
양손에 들고 있는 금쟁반·은쟁반에 금벌레·은벌레가 떨어져 인간 남녀가 된다는 사실은 잉태
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인간창조의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금쟁반·은쟁반을 해와 달의 상징
으로 생각해 보면 금벌레·은벌레는 해와 달의 정기를 받아 하늘에서 내려온 인간으로 볼 수 있
다. 이 인간이 다섯 쌍의 부부가 되어 인간세상을 이뤘다는 설정도 북부 지역의 서사무가인 만
큼 숫자 다섯과 고구려를 연관시키기도 한다. 고구려는 5부족 연합체이고, 고구려 건국신화에
서 해모수가 타고 오는 수레를 다섯 마리의 용이 끌어 오룡거(五龍車)라고 명명했다는 것이다.
미륵이 다스리던 인간세상의 세월은 태평하였는데 석가가 내려와 빼앗고자 했다. 둘 사이에 벌
어지는 인세차지 경쟁은 우리나라 전역에 공통으로 전승되는 대결 신화소이기도 하다. 석가의
속임수로 성패가 갈린 결과 인간세상은 말세가 된다. 그리하여 기생이 나고, 과부가 나고, 무당
이 생겨나고, 역적이 나고, 백정이 나고, 반역이 생겼다고 했다. 그것은 인간은 선하지만 부정
한 신으로부터 원죄가 생겼다는 종교적 인식이다. 또 인간세상의 선악은 통치자의 덕성에 좌우
된다는 사고를 보여주고 있다. ‘창세가’를 신화소에 따라 분류하면 ①천지의 분리 ②일월조정 ③
오산 12제차 중 ‘시루말’의 창세신화 고찰 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