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3 - 오산문화총서 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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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나라 북방식 고인돌의 보고寶庫이다. 그 중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소재의 고인
돌 사적 137호는 그 규모에서 단연 압권이다. 청동기 시대 족장의 무덤이라고 알려져 있는 강
화도의 고인돌군은 해발 436m의 강화도 고려산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 대략 130여기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적 137호로 지정된 강화도의 고인돌은 그 중 북방형 탁자식 고인돌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덮개돌의 무게만도 80톤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한다. 이 돌을 옮기기 위해서는 적어도 성인 장
정 200~300명이 필요하므로 이 지역에 강력한 정치권력을 가진 부족국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지석묘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의 하나로서, 이것은 탁자 모양의 북방식 지석묘이
다. 북방식 지석묘는 강화, 인천, 수원, 이천을 연결하는 선을 한계로 그 북쪽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이 지석묘는 높이 2.6m, 개석의 길이 7.1m, 너비 5.5m나 되는 거석으로 되었다. 크기
로 볼 때 남한 최대의 것이다. 강화도 고인돌에 묻힌 사람은 당시의 족장이거나 그것을 뒷받침
할 만한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강화도 하점면 부근리에 들어서면 밭 가운데 서 있는 거대한 고인돌이 씩씩한 모습으로 찾
는 이를 반긴다. 이 고인돌은 북방식 무덤인데 우리나라 고인돌 중에서 가장 큰 것 중 하나이
며, 썩 잘 생긴 고인돌이다. 비스듬히 경사를 이룬 굄돌 위에 거대한 화강암 덮개돌을 올렸다.
길이 7.1m, 너비 5.5m에 50톤 무게의 덮개돌이다. 이 돌을 얹기 위해서는 적어도 장정 500명
은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렇다면 당시 장정 한 사람이 거느린 가족을 5명으로 잡아
도 이 무덤의 주인은 2,500명 이상을 거느린 막강한 족장쯤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본래 두
개의 석실이 있었으나 모두 없어졌다.
강화도에는 선사시대 유물 유적이 풍부하다. 그 중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 처음 발견된 곳은
하도면 동막리이며 1916년의 일이다. 이후 신석기시대의 대표적 유물인 빗살무늬토기가 이곳
하점면 삼거리 양도면 도장리 등지의 해안에서 발견되었다.
강화도 고인돌의 굄돌은 대부분 동서남북의 4개이다. 동쪽과 서쪽에 세로로 세운 2개의 굄
돌은 덮개돌을 받치는 역할을 하고 남북에 세운 2개는 벽을 막아 세운 것이다. 그런데 오산시
외삼미동 고인돌의 굄돌은 2개이다. 동쪽과 서쪽에 가로로 뉘인 2개의 굄돌은 덮개돌을 받치
는 역할을 하고 남북을 막아 세운 굄돌은 보이지 않는다. 본래 남북을 막아 세운 2개의 굄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그 존재 여부는 알 수 없다.
다음은 강화도 고려산의 탁자식 고인돌과 오산시 외삼미동의 탁자식 고인돌이다. 두 사진을
비교하여 보면 그 차이를 뚜렷이 알 수 있다.
오산시 외삼미동 탁자식 고인돌의 별자리 성혈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