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71 - 오산문화총서 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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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숙·최병기·송영탁·홍경희와 줄타기에 김대균·문정순·김정순 등이 있다.



                         이동안의 자료를 보다보면 부친 이재학이 어린 이동안에게 도대방 자리를 물려줘 이동안이
                        마지막 도대방이었다거나 이동안의 직계 선조들 대부분이 경기재인청의 최고 우두머리인 도
                        대방을 맡았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이 내용은 화랭이 이용우 가계와 상충하는 부분이

                        다. 이와 관련해 “이동안 선생은 시기적으로나 성장 과정상 공식적으로 도대방을 지낼 수 없었
                        다고 봐야 한다. 그 부친인 이재학 역시 도대방직을 기피했다는 점에서 도대방이 아니었다고
                        본다. 그러나 단가와 피리의 명인 조부 이화실, 줄타기의 명인 증조부 이창실의 경우는 속단하

                        기 어렵고, 생전에 이동안 선생의 일관된 진술도 무시하기 어렵다. 무부 집안과 순수 예인 집
                        안이 재인청 내부에서의 동거가 깨지면서 서로의 자존심이 빚어낸 결과로 보인다”는 강영화의

                        말(「용인신문」 내용 발췌)은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하겠다.


                        3. 재인청 스승 김인호(金仁鎬·1855~1930)



                         이동안에게 재인청 춤 30여 가지를 전수한 스승이다. 김인호는 경기도 용인시 원삼 또는 백

                        암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인생 말년에 ‘김량장 할아버지’로 불렸다 한다. 김인호는 온갖
                        민속예능에 두루 능했으며 한말에는 궁중 출입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1년 3월 발간된
                        『춘추』에 소개된 이동백과 한성준이 나누는 대화를 옮기면 “김인호가 두꺼비 재주를 넘다 바로

                        순종 무릎에 떨어지자 기쁘게 웃으셨죠. 원각사에서 형님(김인호)이 소리할 때면 전화통에 귀
                        를 대시고 듣기까지 하셨으니까요”라는 대목이 이를 입증한다. 김인호는 1902년 문을 연 협률
                        사의 단원으로 전국을 유랑하기도 했다. 1914년 2월엔 광무대의 구극(舊劇)에서 땅재주·재담

                        으로, 그리고 같은 해 6월과 7월 광무대에서 웃음거리·탈놀음으로 출연했다. 1915년 2월 김
                        인호학교(金仁鎬學校)를 평양부 기생학교의 하나로 설립하기도 했다. 그해 3월 26일 설립된
                        경성구파배우조합(京城舊派俳優組合)의 부조합장으로도 활동했다. 김인호는 1930년까지 광무

                        대에서 중타령·주리타령 등의 노래, 중춤·법고 등의 춤, 땅재주·탈놀음, 재담과 화극까지
                        공연했다고 한다.













                                                            경기재인청과 오산시독산성문화제 전통 연희(演戲)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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