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1 - 오산문화 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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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VOL. 64  osan culture


                       공립보통학교(현 평창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평창에서는 하숙                  서양 화초가 가득한 붉은 벽돌집에서 생활
                       을 하였다. 이때의 교통수단은 우마차 아니면 도보였다. 그러므로                  하며 유럽여행을 꿈꾸는 등 매우 서구적 취
                       효석은 봉평과 평창 사이 100리를 거의 걸어서 다녔다. 그래서 그                향을 갖고 있었다. 그는 빈궁한 생활을 하면
                       길은 자연 집에서 나와 마을을 거쳐 봉평천(흥정천)에 다다르고 여                 서도 복장을 잘 차려 입고 다녔다. 문학가로
                       기에서는 좌편 강변에 있는 동네 물레방아를 만나게 되고, 그 다음                 서 이효석은 사람의 미묘한 심리 상태를 정
                       은 봉평천 징검다리를 건너 봉평의 성황당을 지나면서 봉평의 본                   확하고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능력이 뛰어났
                       마을 창동리에 들어와 상가와 주점, 봉평장터 걸리를 뚫고 시내를                  으며, 세상에 대한 관찰력과 해석력이 뛰어
                       빠져나오게 되는데 이중 충주집(훗날 「메밀꽃 필 무렵」의 작품 속                 나 자연 정경을 묘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에 나오는 주점)이란 주점도 지나왔다. 봉평 시내를 빠져나와서는                  발휘하였다. 문학과 예술이 인생의 전부였던
                       장평까지 20리, 노루목고개(「메밀꽃 필 무렵」 작품 속에 나오는 고               사람 이효석은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
                       개)를 넘게 되면 장평의 개울「메밀꽃 필 무렵」작품 속에 나오는 개                하는 것은 나날의 생활과 예술이라고 하였
                       울)에 이르며 이 개울을 건너서는 장평 삼거리 (한길은 봉평으로 가                고, 인간 중 시인이 가장 가치 있는 인간이
                       는길, 한길은 강릉, 하길은 평창길)에 닿게 되고 장평에서 대화까지                라 생각하였다.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면 다
                       는 30리, 하장평, 재산, 재재(고개이름)를 넘어 신리, 상대화리, 대화            시 현재의 나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할 정도
                       로 이어진다. 대화면의 대화거리는 곧 대화장터인데 이 거리도 이                  로 문학과 예술이 삶의 전부인 작가였다. 문
                       효석이 걸어 다녔던 길목이 된다. 대화에서 평창까지는 40리, 다시                학가 이효석은 주로 소설을 써서 발표했지만
                       이 길을 거쳐 평창 하숙집에 오게 된다. 6년 동안 이효석은 이 100              습작기에는 시를 쓰기도 했으며 희곡과 시
                       리 길을 왕래하였다. 이효석은 이 100리 길 속에서 자연을 배웠다.               나리오, 평론과 수필 등을 써서 발표하기도
                       봄에는 꽃피는 동산구비를, 여름에는 들판에 깔린 오곡의 청파, 뜨                 했다. 유명 작가로 알려지면서 그는 상당히
                       거운 햇빛, 소나기, 숲의 청산들을 바라보며 가을은 자지러지게 피                 많은 집필 의뢰를 받았다. 이효석은 1936년
                       어있는 메밀꽃밭을 지나면서 멀리 물들어가는 단풍산의 원경에 취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면서 평양 창전
                       하고 낙엽도 밟게 되며 겨울은 산촌에 내리는 눈을 맞이하였고 산                  리 일명 '푸른집'으로 이사하여 두 아들을 낳
                       악 지대의 설경에 파묻혀 살았다. 절기마다 다른 분위기와 변화해                  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한 생활을 하
                       가는 자연의 순환을 맛보게 되었다. 또 절기마다 하늘과 구름의 색                 였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안정된 생활을 하
                       깔이 다르게 변하였고, 바람결 또한 그렇게 변하며 불던 것을 직접                 였는데, 이효석은 아내를 잃기 전인 1940년
                       피부로 느끼며 유년시절을 지내왔던 것이다. 훗날 그의 작품 속에                  까지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 사회적으로
                       나오는 자연의 숨소리가 싱그러운 것은 이 유년시절에 체험하고 몸                  존경받는 생활, 작가로서 유명한 생활을 이
                       에 밴 소질에서 풀어져 나온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효석은 깔끔                 어 나가며 「모밀꽃 필 무렵」과 같이 뛰어난
                       한 외모로 항상 온화한 말로 사람을 대했다고 하며 의지가 굳고 개                 작품을 창작하였다. 이효석은 활발한 사회
                       성이 강한 품성을 갖고 있었다. 다재다능했던 사람으로 평가받는                   생활과 함께 주을 온천과 동해안 등 관북지
                       이효석은 평창공립보통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고 경성제일고등보통                    방의 명승지를 자주 여행했다. 이효석의 행
                       학교를 무시험으로 입학하였으며, 고교 재학 시 학업성적이 우수하                  복한 생활도 오래 가지 못해 1940년 34세
                       여 졸업식에서 우등상을 수상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재학 시절에는                   때 아내를 잃고 이어 차남 영주를 잃었다.
                       영문학 성적이 우수했다. 그 외에도 그는 문학적 능력이 뛰어났으                  그리고 그에게도 삶의 마지막이 찾아왔다.
                       며, 음악적 능력도 탁월하였다. 스포츠에도 재능과 소질을 보였다.                 1942년 5월 25일 아침 7시 30분, 36살의 짧
                       이효석은 서구지향적 모더니스트로 그는 빵과 버터 등의 음식, 커                  은 삶을 마감했다. 사인은 결핵성 뇌막염이
                       피, 모차르트와 쇼팽의 피아노곡 연주, 프랑스 영화감상을 즐겼고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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