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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임원의 거주지나 근처의 건축물 등을 활용하여 사용하는 정도인 것이다.
『조선 무속의 연구』에 성격이나 역할 등 경기재인청과 같은 조직으로 전라도의 ‘신청’ 등이 소개되
어 있는데 신청에서 ‘선생안제’를 지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청의 소재지를 규명할 수 있으나, 『조선
무속의 연구』에서 밝힌 신청은 장흥이나 나주, 진도 등으로 작은 고을의 신청을 기록하고 있어 경기
재인청과는 관할하는 지역 규모에서 차이가 커 상설적인 건축물로 규정하기 어렵다.
경기재인청을 놓고 1949년 이전에 행정구역이 수원군으로 같았던 오산과 수원 지자체가 나름의 근
거를 갖고 자신들의 지역이 재인청 소재지라 주장하고 있다. 또한, 학계의 일부에서는 “3년에 한 번
과거 시기에 한성에서 도청(都廳)의 총회를 열어 선생안제를 지낸다. 대방(大房) 이하 역원(役員) 선
거를 행한 후 향연을 열어 가무(歌舞)를 즐긴다 … 선거는 역원이 상담한 결과 대세에 따라 수망(首
望)·부망(副望)·말망(末望)의 후보자 3명을 열거해 놓고 그 성명을 종이쪽지에 써서 출석 계원으로
하여금 그 아래에 점을 찍도록 하여 점의 수가 많은 사람을 당선자로 했다.”는 『경기재인청선생안』의
기록을 들어 경기재인청이 한성(서울)에 있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한다.
『조선 무속의 연구』에 소개된 ‘나주 신청’ 모습. 북문정(北門町)에 있으며
1930년대에 개축한 함석집으로 ‘기생음악학습소’로 기록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오산시사
그러나 재인청을 구체적으로 알린 기록물, 특히 재인청 조직의 ‘선생안’ 등을 경기도 수원군 성호면
부산리(현재 오산시 부산동)에 있는 무부 이종하 가계가 갖고 있었다는 사실로 보아 재인청 조직이
제 있는 오산시 부산동을 경기재인청의 중심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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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서울에 경기재인청이 있었다는 근거로 식년시 과거가 있는 3년마다 서울에서 선생안제를 지내고
대방 등 임원을 선출했다는 사실을 들고 있으나, 이는 과거급제자의 의정부 축하행사인 은영연(恩榮
268 宴)이나 삼일유가에 많은 재인들이 참석하기에 별도로 한자리에 모여 선생안제를 지내고 대방 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