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廟) 등 국가의 중요한 행사 시에 행해졌다. 산대는 산 모양의 커다란 장식물로 바퀴가 달려 이동하기 265
도 하였는데 공연장의 무대 같은 구조물이다. 산대에 관한 기록은 신라 진흥왕 때 행해진 팔관회에서 구비전승
처음 나타나는데 고려시대까지 주로 ‘채붕(彩棚)’이란 명칭으로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산대·산거(山
車)·오산(鰲山)이라 호칭했다. 오산은 중국에서 산대를 부르는 명칭인데 이는 중국 한나라의 신선사 · 민속
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동쪽바다에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방장산·영주산 등 삼신산(三神山)을 · 경기도당굿과
자라가 받치고 있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1784년(정조 8년) 정조는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책봉과 관련, 중국에서 오는 칙사를 맞이하기 위해
나례도감(儺禮圖鑑)을 설치하고 8도 재인들을 불러 산대희를 성대하게 열었으나 준비하는 과정에서
경기재인청
광화문 높이에 이르는 산대의 제작비를 강경상인이나 시전상인에게 부담시키는 등 여러 문제가 발생
하여 그해 이후 대규모 산대희는 열리지않고 산대희류의 연행 정도만 유지되었다. / 성씨 · 인물
『악학궤범』에 나오는 ‘침향산(沈香山)’으로 중앙의 산대희에서 사용하는 소형 산대다.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과 사찰·탑·부처·사슴 등의 모양을 판자로 만들어 붙였다.
또한, 관가의 공역은 주로 지방의 산대희를 말하는데 그 지역의 감사 등 높은 관직의 취임 축하연
등이 이에 해당하며 재인청의 재인들이 담당했다. 이외에 재인청 재인들의 중요한 역할은 고려시대
광종 때부터 이어져 1894년에 폐지된 과거시험 급제자를 위한 다양한 연희의 설행이었다. 조선시대
만 해도 3년마다 치러지는 식년시(式年試)와 별시인 증광시(增廣試), 여기에 9개월에 한 번씩 치러지
는 각종 별시로 인해 재인들의 역할은 꾸준했다. 과거급제 시 급제자들을 위해 의정부에서 베푸는 은
영연(恩榮宴)을 시작으로 광대와 재인을 앞세우고 서울 시가지를 사흘간 도는 삼일유가(三日遊街),
집에 돌아가 조상의 사당에 과거급제를 고하는 홍패고사, 집에서 과거급제를 알리는 문희연(聞喜宴)
등의 행사에 재인들이 동원되어 축제가 벌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중앙과 지방에서 벌어지는 산대희
와 나례희, 지방 관료 부임 시에 축하연, 매년 벌어지는 대소규모의 과거급제 축하연 등이 조선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