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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지막 화랭이 이용우(李龍雨·1899~1987)
이용우는 경기도 수원군 청호면 부산리(현 오산시 부산동)에서 전통적인 세습무인 이종하(李鍾河)
와 미지(巫女) 사이에 태어났다. 9세 때 부친의 소실 경상도 김해 태생 박금초(朴錦草)에게 판소리 창
을 학습했다. 이때 부친과 소실 박금초가 이끄는 창극단을 따라 전국을 유랑했다. 명창 송만갑(宋萬
甲)·이동백(李東伯) 등도 같이 다녔다고 한다. 이 창극단이 13세에 해산하자 15세까지 통도사에 들
어가 독공을 하고, 스님에게 역학을 배웠다. 15~20세에 광무대·단성사(團成社) 등을 따라 평양·함
경도 등을 유랑했다. 20세에 고향 경기도 오산에 돌아와 농사를 짓고 장가를 갔다. 그 무렵 독학으로
대금을 불었다고 한다. 22세 무렵부터 숙부 이종만에게 6년간 당굿을 배웠다. 29세에 경기도 광주에
서 경기도당굿에 입문했다. 30세 무렵 창극단을 따라 부정기적으로 지방에도 다녔으며, 틈틈이 당굿
에도 참석했다. 그때 창극인 임춘앵과 4년 동안 같이 다니기도 했다. 이용우는 만혼을 해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88세인 1987년 5월 6일 경기도 안성의 한 저수지에 낚시를 다녀오다 교통사고로 세상
을 달리했다. 1970년대 이용우가 집안 내력을 직접 밝힌 기록을 보면 “운현대감(雲峴大監·대원군)
이 팔도도대방으로 국악총책임 직함을 가지고 있었고 그 밑에 도산주가 있었다. 그러다가 그것(팔도
도대방)을 증조부에게 넘겼고, 다시 조부에게 넘겼다. 선친도 그 소임을 계승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팔도 사니 도조합장을 일본인이 하였고, 숙부 이종만이 부조합장을 했다. 고조(高祖) 이상은 잘 모르
겠고, 증조부는 초시도 2층관(二層冠)밖에 못 쓰는데, 3층관을 쓰고 찍은 사진과 진사를 지낸 홍패와
문서가 집에 있었다. 한국전쟁 때 불에 탔다. 이통정(李通政·이동백)도 선친이 만들어준 것인데 3층
관은 못썼다. 3층관을 쓴 이는 우리 증조부뿐이다.”라고 밝혀 재인청의 중요한 역할을 한 집안 내력
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용우의 가계는 아키바 다카시·아카마쓰 지조 두 일본인 학자가 현지조사를
통해 저술한 『조선 무속의 연구』에서도 드러나는데 재인청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인 『경기도창재도청
안(京畿道唱才都廳案)』, 『경기재인청선생안(京畿才人廳先生案)』, 『경기도창재청선생안(京畿道唱才廳
先生案)』 등을 이용우의 부친 이종하가 보관하고 관리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집안이 재인청에
서 차지하는 위상을 잘 말해준다 하겠다. 또한 이용우의 고조부인 이계명(李啓明)의 효행을 표창하기
위한 ‘표창방(表彰方)’의 문건도 이용우 가계가 정통성 있는 세습무 집안이었음을 밝혀준다.
이용우의 가계
세대 성명 재인청 직위 이용우와의 관계
1 이계명(李啓明) 표창방(表彰方) 고조부
오산시사 2 이광달(李光達) 팔도도대방(八道都大房) 증조부
3 이규인(李奎仁) 팔도도대방(八道都大房) 조부
이종하(李鍾河) 팔도도대방(八道都大房)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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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종만(李鍾萬) 도산주(都山主, 1908) 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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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5 이용우(李龍雨) 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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