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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출하는 선거를 치르지 않아도 되는 편리성이 있기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경기재인청과 성격, 역할 269
이 비슷한 서울의 ‘노량진 풍류방’의 경우 선생안제를 지내지 않았고 종교적 의식도 약한 집단으로 알 구비전승
려져 있는데 이것은 서울의 경우 세습무가 아닌 강신무(降神巫)의 활동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결속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경기재인청이나 충청도·전라도의 재인청은 세습무 만이 계원으로 참여 · 민속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수원시의 경우도 수원(화성)재인청이 정조의 어진을 모신 화성 · 경기도당굿과
행궁 화령전 근처에 있었다고 주장하나, 이것은 경기재인청 출신 춤꾼 이동안(李東安·1906~1995)
의 주장을 확대 해석한 것이다. 이동안은 화성 태생으로 생전에 부친 이재학(李在學)이 수원재인청
도대방 출신이었고 자신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도대방을 맡았었다고 주장했다. 이동안은 한때 활동
경기재인청
하던 서울에서 내려와 화령전 옆 재실로 쓰였던 풍화당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그곳을 재인청이라
칭하여 많은 후학들이 수원재인청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다른 주장은 화령전 안쪽에 초가집이 있었
는데 이곳이 재인청이란 설이다. 이 설도 여러 증언에 의해 재인청이라 불렸지만 신뢰도가 떨어진다. / 성씨
또한, 수원재인청은 오산에 있었다는 경기재인청과는 다르다는 주장이다. 경기재인청 밑에 있는 군 · 인물
(郡) 재인청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동안이 주장하는 선친이나 조부가 재인청 대방을
맡았다는 사실은 모순이 된다. 군 재인청의 우두머리는 청수(廳首)라 불렀기 때문이다. 경기재인청
이 폐쇄된 1920년에는 오산과 화성이 수원이라는 행정구역에 포함돼 있어 처음부터 수원재인청은 없
었고, 경기재인청을 수원재인청이라 불렀을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 이동안의 주장대로 조부나 부친
이 경기재인청의 대방을 맡았었다는 주장도 개연성은 있다. 그것은 재인청 도대방이 3년 임기의 선
출직으로 이동안의 가계 또한 재인청 도대방을 맡아도 될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평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동안과 그의 가계가 우리 민족의 춤과 장단 등 전통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경기재인청의 대표적 재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수원문화사 연구회장과 화성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을 지낸 이제제(李梯帝)는 「재인청고(才人廳
攷)」를 통해 “… 화령전을 관리하기 위하여 화성유수가 겸임하는 제조(提調) 1명과 판관이 겸임하는
영(令) 1명의 관원을 두었다. 따라서 화령전의 역사적 성격이나 문헌상으로 보아 재인청은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현재의 오산시 부산동에 있었던 무가들의 연합인 사적(私的) 조직으로 본다.”고
하여 경기재인청이 오산에 있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4. 경기재인청 재인들
경기재인청은 1784년 설립돼 1920년 폐청되기까지 수많은 재인들이 활동하였지만 몇몇 판소리 명
창을 제외하고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재인청 재인들은 1894년 갑오경장으로 신분제도가 폐지되
며 무부로서의 역할을 직업적으로 이어가거나 협률사(協律社)나 광무대(光武臺), 원각사(圓覺社) 등
현대식 공연장에서 재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일부이지만 1900년대 들어 활발하게 활동했던 대
표적 재인들을 정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