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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웃음거리·탈놀음으로 출연했다. 1915년 2월 김인호학교(金仁鎬學校)를 평양부 기생학교의 하나
로 설립하기도 했다. 그해 3월 26일 설립된 경성구파배우조합(京城舊派俳優組合)의 부조합장으로도
활동했다. 김인호는 1930년까지 광무대에서 중타령·주리타령 등의 노래, 중춤·법고 등의 춤, 땅재
주·탈놀음, 재담과 화극까지 공연했다고 한다. 이동안이 14세이던 1920년 장가든지 사흘 만에 무작
정 상경해 광무대에 갔을 때 김인호의 나이가 70세에 가까웠다고 해 그의 출생 연도를 추측해 볼 뿐
이다.
4) 발탈의 대가 박춘재(朴春載·1881~1948)
서울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 활약한 경기·서도소리의 명창. 자라면서 소리를 좋아하여 처음
홍필원(洪弼元)·홍필광(洪弼光) 형제를 사사(師事)하여 잡가와 선소리를 배웠다 한다. 박춘경(朴春
景)에게서 시조와 잡가를, 조기준(曺基俊)에게서 가사(歌詞) 등을 배워 시조와 잡가 및 선소리로써 대
가를 이뤘고, 재담은 따라올 자가 없었다고 한다. 1900년 궁내부가무별감에 임명되어 어전 연주의
특전을 얻었다. 화려하던 광무대 활동 시절에는 특유의 재담과 가무, 탈놀이의 하나인 발탈 기예로
명성을 높였다. 그의 소리는 박천복(朴天福)·오영근(吳英根)·김경호(金慶浩)로 이어졌는데, 특히
박천복에 의하여 그의 소리가 전해져 온다.
5) 줄타기 명인 김영철(金永哲·1920~1988)
김영철은 경기도 과천면 갈현리 세습무 집안에서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김완근은
거문고의 명인이었다. 김영철은 전통적인 예인집단의 후예답게 음악은 물론이고 줄타기 등 각종 공
연 종목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김영철은 9세에 이웃에 사는 줄광대 김관보의 기예를 보고 줄타
기를 학습했고, 17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줄타기 공연을 시작했다. 김관보의 제자 임상문·이정업·
이동안 등과 같은 연희계의 명인과 함께 줄타기 및 땅재주를 공연했다. 해방 전까지 임상문의 아버지
임종원이 운영하던 대동창극단에서 활동했고, 해방 후에는 아리랑여성농악단·김뻑국예술단 등의
단체에 속해 있으면서 줄타기 및 여러 공연에 참여했다. 1975년부터 1978년까지 한국민속촌에 정착
하여 전속공연을 했고, 197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 줄타기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김영철은 또한
부친으로부터 이어받은 음악성을 꾸준히 계발하여 철현금 산조라는 창조적 음악을 탄생시켰다. 김영
철은 하와이안 기타 연주를 듣고 철현금을 개발했다. 철현금 개발 초기에 김영철은 공연단의 민요 합
오산시사
주나 무용 반주를 주로 했지만, 후기에는 거문고 명인 한갑득과 가야금의 명인 박상근 등과 교유하면
서 철현금 산조를 만들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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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살풀이 예능보유자 김숙자(金淑子·1927~1991)
272 전통무용가. 호는 매헌(梅軒).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곡천리에서 출생했다. 김숙자의 조부 김석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