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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마무리하는 춤사위가 특색이다. 반주하는 악기는 삼현육각이며, 장단은 염불-도도리-타령-굿거 275
리·당악-살풀이다. 구비전승
(5) 장고무 · 민속
상심한 임금을 달래기 위해 공주가 장구를 둘러메고 춘 춤이라 전해진다. 일명 장고춤으로 불린다. · 경기도당굿과
농악의 장고놀이 중에서 재미나는 여러 부분을 떠다가 무대화시킨 장고무는 농악 쇠가락의 변화시킨
리듬과 함께 무용적인 요소를 가미시켜 재구성한 무용이기 때문에 민속무용의 중요한 종목의 하나로
널리 공연되고 있다. 농악놀이의 연풍대·자반뒤지기·까치걸음 등의 재주도 장고춤에 곁들여졌으 경기재인청
므로 장고무는 전통의 현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로 꼽힌다. 단순하고 단아한 춤사위
에 멋들어지고 절제된 춤사위가 이 춤의 특징이다. 춤복으로 남색치마와 하얀 저고리에 허리띠를 맨
다. 무구는 홍장구와 장구채. 장단은 휘모리-늦은 굿거리-자진 굿거리다. / 성씨 · 인물
(6) 검무
칼을 휘두르며 추는 춤으로 검기무(劒器舞) 또는 칼춤이라고도 한다. 『동경잡기(東京雜記)』와 『증보
문헌비고』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 소년 황창(黃昌)이 백제에 들어가 칼춤을 추다가 백제의 왕을 죽이
고 자기도 죽자, 신라인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그 얼굴을 본떠 가면을 만들어 쓰고 칼춤을 추기 시
작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동경잡기』 「관창조(官昌條)」에 고려말 및 조선 초 사람인 이첨(李詹)이
변백(변명)하기를 “을축년 겨울 계림(鷄林)에 객으로 갔을 때 부윤 배공(裵公)이 향악을 베풀고 위로
했는데, 가면을 쓴 동자가 뜰에서 칼을 들고 춤을 추기에 물었더니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신라에 황
창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나이가 15, 16세 정도이나 춤을 잘 추었다.”라고 한 기록에서 고려 말까지
가면을 쓰고 칼춤을 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첨은 같은 책에서 황창이라 한 것은 관창이 잘못
전해진 것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성종 때 편찬된 『악학궤범』에 수록돼 있지 않은 점으로 보아 조선 초
기에는 성행하지 않은 듯하다. 그 뒤 숙종 때 김만중(金萬重)의 「관황창무(觀黃昌舞)」라는 칠언고시에
따르면 기녀들이 가면 없이 연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춤꾼의 숫자도 4인무에서 영조 때 2인무로
줄었고, 순조 때까지만 해도 긴 칼을 사용했다. 경술국치 이후 관기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기녀들이
민간사회로 나와 그들에 의해 계속 추어졌으나, 본래의 형태로부터 많이 축소되어 왔다. 현재 비교적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진주검무’가 있는데, 1967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됐다. 춤복
으로 남색 치마, 노랑 저고리, 검정 궤자, 홍색 전대를 입고 철릭을 쓴다. 무구는 칼 두 자루다. 장단
은 허튼 타령-자진타령이다.
(7) 한량무
한량무는 조선 중엽 이후에 남사당패에 의해 처음 연희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중엽은 중인
계급의 사람들이 후원하여 광대예술이 전성기를 맞이하는 시기다. 그러나 고종(재위 1863∼1907)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