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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고려시대·조선시대에는 신분제도가 있었던 만큼 특수한 한 계층이 세습적으로 이 역할을                                            261
                  담당했다. 재인청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경기도창재도청안(京畿道唱才都廳案)』 ,                                           구비전승

                  『경기재인청선생안(京畿才人廳先生案)』 등의 기록으로는 조선시대인 1784년(정조 8년)부터 일제강점
                  기인 1920년까지 130년간 있었다고 한다. 1836년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경기도창재도청안』에는 ‘훈                                     · 민속

                  서(訓序)’가 실려 있는데 이 글 내용에 경기재인청 재인에 관한 많은 사실들이 나타나 있다.                                             · 경기도당굿과



                        … 우리들의 천역(賤役)을 조정에서는 천하게 보고 향읍에서 또한 가련하게 내려다보면서 우
                        리를 사람들의 끝자리에 놓는다. 그런즉 우리 무리 또한 어찌 천역으로서 스스로를 버리려 하
                                                                                                                    경기재인청
                        는가. 그러므로 자고이래로 유유상종이라 하였으니 청(廳)을 설치하고 계(契)를 만들어 자리를
                        배열하고 안(案)을 만들었다. 대방께서 영솔(領率)하시니, 영솔하기 위하여 대방을 따르는 것

                        으로 우리 청의 규칙을 삼는다. 아, 우리 계원 4만 명은 어찌 스스로 서로를 멸시하고 규약을                                       /  성씨
                        깨뜨릴 수 있겠는가. 대개 우리들이 맡은 것은 나라에서 칙사 시에 조산위희(造山爲戱)하는 것                                       · 인물

                        이다. 저 사람들에 영합하여 청에 참석하고 공역(公役)에 응하여 관가에 이바지하고, 사적으로
                        는 다른 사람들을 섬겨 자신을 살찌우니 대개 천한 장부가 하는 일이다. 그러나 갑진(甲辰) 이

                        전의 칙행조산(勅行造山)시에는 맡은 바가 스스로 중하였으나 갑진 이후에 조산의 규칙이 깨
                        지자 우리 무리들도 곧 한산해지게 되었다. 여전히 관가의 공역에 응하고 또 청내에 규칙을 세

                        웠으니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소홀하고 태만하겠는가. 오직 우리 계원들만도 경기(京畿)에 4
                        만 명이니 모두 청의 훈계를 따르고 우리의 약속을 좇는다 ….



                    이 기록을 보면 경기재인청 재인들이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 그들을 영접하기 위해 조산위희, 즉

                  산대(山臺)를 설치하고 연희를 하였다. 또한, 지역 관가의 행사에 동원되어 공역을 하였음을 알 수 있
                  다. 사적으로도 다른 사람을 섬겨 자신을 살찌운다고 하였는데 이는 과거급제자를 위해 잔치를 벌

                  이는 문희연 등 사가(私家)의 행사에서 공연을 하고 수입을 올렸다는 내용이다. 이밖에 중요한 사실
                  은 갑진년 이전에 행해졌던 칙행조산이 갑진년 이후에 중단됐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에서의 갑진년

                  은 1784년으로 정조 8년이다. 정조 8년에 중국에서 오는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시행했던 산대를 중
                  단했다는 내용이다. 산대의 중단으로 재인들이 한가해졌으나 청내에 규칙을 세우고 관가의 공역에

                  응하는 등 재인들이 그들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재인청 조직의 우두머리인 대방이 훈서를 통해 밝
                  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칙행조산의 규칙이 깨진 갑진년 1784년을 경기재인청의 성립 시기로 보

                  고 있다. 이러한 중요한 내용이 담긴 『경기도창재도청안』과 『경기재인청선생안』 , 『경기도창재청선생
                  안(京畿道唱才廳先生案)』 등을 소유한 사람은 경기도 오산시 부산동에 거주했던 이용우(1899~1987)

                  였다. 이용우는 12대째 세습무로 증조부·조부·부친이 경기재인청 최고 우두머리인 대방을 지냈다.
                  ‘선생안’은 조선시대 중앙 및 지방의 관아에서 전임 관원의 성명과 본적, 생년, 관직 등을 기록한 책

                  으로 재인들이 이를 차용하여 재인청의 역대 대방이나 직책을 맡은 사람들의 성명을 적어놓은 책이
                  다. 그러므로 『경기재인청선생안』에 적힌 명단을 대상으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듯 과거가 열리는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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